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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을 프렌치 어니언 수프를 끓여야 하는 이유

글 박상현(음식칼럼니스트) | 사진 셔터스톡



마음이 심란할 때면 가끔 양파를 볶는다. 우선 양파 2~3개를 최대한 곱게 채썬다. 칼날이 무디고 요령이 부족하면 매운 기운에 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 하지만 상관없다. 어수선할 땐 이 또한 카타르시스로 느껴지기 마련이다.

중약불로 달궈진 팬에 버터를 녹이고 채썬 양파를 볶기 시작한다. 고소한 버터향과 날것 그대로의 양파향이 스멀스멀 느껴진다. 조급한 마음에 불을 세게 하는 건 금물. 약한 불로 꾸준히 볶는 것이 관건이다. 양파가 숨 죽으면 수분이 나온다. 이를 그냥 방치하면 단맛만 날 뿐 양파 특유의 향이 죽는다. 그래서 부지런히 저어 수분을 날려줘야 한다. 방심할 틈이 없으니 번뇌 따위가 끼어들 틈이 없다.

서양요리의 기본인 양파 캐러멜라이즈

1시간쯤 지나면 양파는 점점 갈색으로 변한다. 양파의 색이 짙어질수록 단내가 올라온다. 단내가 강할수록 양파의 단맛 또한 놀랄 만큼 증가한다. 최소 두 시간 이상은 볶아줘야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 이를 두고 양파 캐러멜라이즈라고 한다. 서양요리의 기본 중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과정이다.

이렇게 한바탕 양파를 볶고 나면 심란했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안정을 찾는다. 게다가 맛이라는 뜻밖의 보상까지 받는다. 캐러멜라이즈한 양파는 여러모로 쓸모가 많다. 따뜻할 때 바게트나 식빵에 올려 먹으면 어지간한 잼보다 낫다. 햄이나 치즈가 있으면 근사한 샌드위치가 그냥 만들어진다. 카레의 루(Roux·서양요리에서 소스나 수프를 걸죽하게 하기 위해 밀가루를 버터로 볶은 것)로 사용하면 훨씬 농후한 카레를 만들 수 있다. 이외에도 냉동실에 보관해두었다가 설탕 대신 단맛을 내는 조미료로 사용하면 단맛은 물론이거니와 감칠맛까지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캐러멜라이즈한 양파가 가장 돋보이는 건 뭐니 뭐니 해도 프렌치 어니언 수프를 만들었을 때다. 흔히 양파수프라 부르는 프렌치 어니언 수프는 캐러멜라이즈한한 양파에 와인과 육수를 붓고 뭉근하게 끓인 다음, 먹기 전에 치즈를 듬뿍 올리고 치즈가 녹을 때까지 오븐에 익히는 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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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렌치 어니언 수프(사진=헬스조선DB)


양파·와인·육수·치즈가 어우러져 만드는 조합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달고 농후한 맛을 낸다. 일단 한번 맛보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좋아하게 되는 음식이다. 듬뿍 들어간 치즈가 뜨거운 열기를 보듬고 있어 먹는 내내 따뜻한 기운이 유지된다. 그래서 양파수프 한 그릇을 비우고 나면 온몸이 후끈 달아오르며 생기가 돈다. 요즘처럼 기온이 갑자기 떨어져 컨디션이 나쁘거나 환절기를 맞아 감기·몸살을 앓는 이가 많을 땐 이보다 좋은 음식은 없다.

다른 음식과 섞이지 않을 때 진가 발휘하는 양파수프

그런데 ‘프렌치’라는 수식어 덕분인지 양파수프를 프랑스사람의 소울푸드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진위 여부를 확인해봤더니 사정이 좀 달랐다. 파리에 살면서 국내 유명 방송의 현지 코디네이터로 활동하고 있는 지인은 꼬꼬뱅이나 달팽이요리처럼 프랑스 사람들의 일상적인 음식은 아니고 관광상품 정도의 상징성에 그친다고 했다. 파리의 유명 미슐랭 레스토랑을 거쳐 현재는 국내 프렌치 요리의 대표주자로 활동하고 있는 윤화영 셰프 역시 프랑스에서 사는 12년 동안 딱 한 번 사먹어봤을 정도로 흔한 음식이 아니라고 했다. 마치 외국인들이 한국 사람들은 매일같이 불고기나 삼계탕을 먹는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이처럼 상대 문화에 대한 성급한 일반화는 오히려 본질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기도 한다.

오해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양파수프가 마치 프렌치의 시그니처 메뉴쯤으로 인식되다 보니 양파수프의 완성도를 놓고 프렌치 레스토랑의 수준을 따지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곤 한다. 물론 가장 기본적인 음식인 까닭에 그 완성도를 따지는 것은 당연할 일이지만, 요리사들의 입장에서는 말 못할 고민이 있다. 양파수프는 그 자체로 맛이 지나치게 강하고 양도 많기 때문에 이후에 이어지는 음식의 섬세함을 느끼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 요리사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음식이 양파수프의 그늘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는 형국이다. 여러 음식과의 조화보다는 단품으로나 어울리는 음식이다.

요섹남·요섹녀 시대… ‘감성푸드’인 양파수프가 딱

그럼 정통 프렌치 요리사가 생각하는 양파수프의 포인트를 한번 알아보자. 윤화영 셰프는 우선 육수의 선택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오리지널 리옹식은 소뼈(사골)를 우려낸 국물을 사용하는 반면, 파리식은 사골육수와 닭육수를 섞어서 사용한다. 닭육수는 감칠맛이 풍부한 대신 들큼한 맛이 도드라지고 콜라겐이 우러나와 농도가 걸쭉하다. 사골육수는 단맛이 적어 전체적인 밸런스가 잘 맞는 대신 농도가 묽고 맛의 복합성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

다음으로 치즈의 선택이다. 일반적으로는 모차렐라나 에멘탈 치즈 등을 많이 사용하는데, 이런 치즈는 그 자체로 단맛이 있어 양파와 육수의 단맛과 결합했을 때 자칫 물릴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윤 셰프는 그뤼에르 치즈를 추천한다. 숙성기간이 긴 그뤼에르 치즈는 염도가 높고 특유의 향과 감칠맛이 있어 양파수프의 밸런스를 도와주고 복합적인 맛을 낸다.

이처럼 양파수프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한 것은, 올가을엔 당신만의 레시피를 꼭 한번 만들어보라는 의미다. 요리 잘 하는 남자와 여자가 섹시해 보인다는 ‘요섹남’, ‘요섹녀’의 시대. 이제 어지간한 요리로는 주목을 받기 힘든 시절이 도래했다. 이런 혼돈의 시대에는 감성에 호소하는 음식만큼 좋은 것도 없다. 양파수프가 딱 그렇다. 만든 사람을 돋보이게 하고 먹는 사람을 위로해 주는 음식. 이만하면 한번 도전해 보고 싶은 의지가 생기지 않으신가?

/박상현 음식의 역사적 배경과 사회적 맥락을 탐구하고 추적하는 일에 관심이 많은 맛 칼럼니스트. 현재 건국대 아시아콘텐츠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있으며, 페이스북에서 ‘여행자의 식탁’이라는 페이지를 통해 대중에게 맛깔 나는 맛 얘기를 들려주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일본의 맛, 규슈를 먹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