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01-17

60대 여성이 외래진료실을 찾아 왔다. 원래 콜레스테롤 수치가 많이 높아 약물치료를 하던 분이었는데, 차차 공복혈당 수치도 오르고 좀처럼 떨어지지도 않고 혈압마저 약간 높아 지난 번에 왔을 때, 고혈압과 당뇨병에 대한 투약을 추천하고 이에 병행해야 할 식사조절도 언급을 하였다. (사실 식사에 대한 언급은 이미 혈당이 오르기 시작한 1년 전부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번 방문 전 시행한 검사에서도 공복혈당은 여전히 높은 상태였고, 혈압도 계속 높았다.

의사 : 지난 번에 드린 당뇨병 약제와 고혈압 약 잘 드시고 오신 건가요?
환자 : (머뭇) 사실, 안 먹었어요?
의사 : 안 드신 무슨 이유가 있나요?
환자 : 약 안 먹고 식사나 운동으로 치료해 보려구요.
의사 : 그건 이미 1년 넘게 시도해 보셨쟎아요. 그리고 그런 걸로 될만큼 만만한 정도의 당뇨병이 아닌데요..
환자 : 그도 그렇고 친구들이 약을 잘 생각해 보고 먹으라고 그래서요
의사 : 예 ? 뭐요?
환자 : 아니, 그게… 약 한 번 먹으면 평생 먹게 되니까, 잘 생각해 보고 시작해야 한다고 해서요
의사 : (속으로) 맙소사…

이런 대화는 사실 외래를 보는 날마다 매일 벌어진다. 많은 수의 환자들이 약을 일생 먹게 되는 질환에 대해 생각하기를 약을 한 번 먹기 시작했기 때문에 뗄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고 생각한다. 과거 어르신들이 ‘印이 박혔다’라고 하며 계속 하게 되는 습관을 표현하던 (아마 커피에 맛이 들렸을 때 자주 그랬던 거 같다.) 그 생각을 고혈압이나 당뇨병, 고지혈증에도 적용하여 생각하는 거 같다.

이는 환자 자신은 물론 의사와 환자가 얽혀 사는 의료현장, 그곳의 문화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 위와 같은 대화가 앵무새처럼 반복이 되어 보다 중요한 대화를 할 시간을 박탈하며, 환자들은 이런 오해로 인해 피해의식도 가지며 (약을 신중하게 시작하지 못하여 내가 평생 약을 먹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는 식) 더 나쁜 것은, 이 환자의 친구처럼 남에게까지 잘못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환자는 안경을 쓰고 계셨다. 대화는 계속 된다.

의사 : 안경을 쓰셨네요. 왜 쓰게 되셨어요?
환자 : 아, 그거야 눈이 나빠져서 썼죠.
의사 : ‘좀 신중하게 쓰기 시작하시지, 한 번 쓰게 되어서 못 벗고 계속 쓰시게 되면 어쩌시려구요.’ 라고 남이 얘기하시면 뭐라고 하실래요?
환자 : 그건 아니죠. 눈은 계속 나쁘니까. 안경 때문에 계속 쓰게 되는 건 아니쟎아요.
의사 : 빙고 ! 고혈압 약, 당뇨병 약도 마찬가지인데요. 고혈압, 당뇨병이 계속 몸에 남아 있는 병이니까 약도 계속 몸에 걸치게 되는 거죠. 약에 중독되고 쩔어서 뗄 수 없는 게 아닌 건데요. 안경이 그런 게 아니듯이.
환자 : .아… 그런 거군요. 그런 것도 모르고.. 그 친구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그런 얘기를 한담.

이 작은 일상의 대화는 우리의 의료문화, 환자들의 속성에 대한 몇가지 면을 볼 수 있게 한다. 우선은 평생 가는 병의 치료를 위한 약물사용에 대해 적지 않은 경계심과 불안과 오해가 존재한다는 것, 두번째는 그렇다 하더라도 전문가 보다는 이웃의 얘기에 귀가 더 솔깃한다는 것, 세번째, 비약물치료의 효과에 대해서는 도리어 과대하게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약물치료는 무시도 과신도 하지 말아야 할 보조수단이다.) 매체홍보, 계몽, 진료실에서 같은 얘기의 반복이 매일 계속되지만, 다수 대중의 속성이라 쉽게 개선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사실 이런 환자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병의 종말을 알고 늘 보고 사는 의사 입장에서는 투약거부감을 갖는 환자들이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설명으로 이해를 하는 환자도 많지만, 사람이 어디 자기가 겪지 않고도 동감하기가 쉬운가? 이 환자는 콜레스테롤 높은 것에 대해서는 심리적 거부감 없이 약을 드셨지만, 고혈압과 당뇨병에 대해서는 유독 인색하였다. 그건 아마도 주변에 콜레스테롤이 높아 혈관질환으로 피해를 본 사람이 있어, 그 점은 경각심이 생겼지만 고혈압과 당뇨병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의사된 도리로 환자가 고혈압과 당뇨병으로 인한 합병증을 겪은 후에 혹은 간접경험이라도 한 후에 치료하자고 기다릴 수도 없다. (설명은 할 만큼 하는 의사가 거의 전부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사건을 겪은 후라야 마음을 바꾸고 그 때는 또 고혈압, 당뇨병 조절에 대해 강박적인 사람이 된다.)

만성질환은 그림자와 안경처럼 몸에 붙어 있는 존재이며 없애야 하는 혹은 없앨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말썽을 일으키지 않게 혹은 말썽을 일으키더라도 덜 심하게, 더 늦게 일으키도록 잘 달래고 살아야 하는 말썽꾸러기들이다. 약을 먹는 바람에 인이 박히게 된, 억울한 상황인 것이 아니라, 하필 몸에서 떨어지지 않는 그런 병이라 약을 계속 먹어야만 하는 것이다.

‘처음에 잘 생각하고 안경을 썼어야 했는데,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써서 계속 쓰게 되었다. 그러니 넌 잘 생각해서 써라’ 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도 그 사람을 어리석다고, 뭘 한참 잘못 알고 있다고 할 것이다. 고혈압, 당뇨병 약을 두고도 그런 말은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기고자 : 보라매병원 정우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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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가는 길

[보라매병원]
정우영 교수

보라매병원 내과
서울의대 내과 부교수
미국 미네소타 로체스터시 메이오클리닉 연구원 (2011~2012)
미국 뉴욕시 코넬 콜럼비아 병원 단기연수 (2002)
일본 기타큐슈시 고쿠라기념병원 단기연수 (2002)

외래와 입원 진료 현장에서 벌어지는 소소하지만 생각하고 느껴보아야 하는 일상들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환자들이 모르는 질병의 숨은 면, 그래서 벌어지는 오해, 의사들의 말 못할 고충, 내가 모르는 다른 환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서로 이해하고 격려하는 훈훈한 병원문화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