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의학사
러시아제국을 멸망시킨 '여왕의 유전자'
울산 의과 대학교
이재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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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여왕의 손녀인 알렉산드라는 1894년 러시아제국의 황제 니콜라스와 결혼했다. 그녀는 네 명의 딸을 출산한 끝에 드디어 왕위를 이을 아들을 낳았지만 아기는 출생 후부터 배꼽에서 출혈이 잘 멎지 않았고, 극히 가벼운 타박상에도 커다란 피멍이 생겼다. 혈우병이었다. 사랑하는 아들이 불치의 병에 걸려있다는 사실은 황제 부부 특히 어머니인 알렉산드라 황후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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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돌이 승려 라스푸틴은 이로써 당시의 러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다. 어린 황태자를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그의 말을 황후가 무조건 따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황실이 황태자의 병에만 노심초사하는 사이에 나라 살림은 피폐해져 갔다. 정부의 각료를 마음대로 바꿀 정도로 전횡을 일삼던 라스푸틴은 결국 1916년 말에 암살되어 강물 속에 던져지지만 러시아의 국운은 이미 기울어진 다음이었다.
라스푸틴이 죽기 얼마 전 남긴 편지에는 자신이 한달 이내에 죽을 것이며 그로부터 1년 후에 황제와 가족이 모두 죽을 것이라는 불길한 예언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1917년 러시아에는 혁명이 일어났고 내전의 와중에 체포된 황족들은 1918년 7월 16일 밤 볼셰비키에 의해 전원 총살되었다. 빅토리아 여왕의 혈우병 유전자가 초래한 비극적 결말이었다.
/울산의대 인문사회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