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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의학⑨] '성평등 진료' 시도하는 '협동조합' 병원들
전혜영 헬스조선 기자
입력 2021/06/14 17:00
차별과 혐오는 건강을 해친다. 여성과 남성, 누구에게든 '젠더의학'이 필요한 이유다. 평등하게 진료받고, 평등하게 치료하며, 불평등이 부른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우리에겐 젠더의학이 필요하다. 그동안 젠더의학 필요성과 접목 사례를 조명했으나, 현실적으로 국내 의료 환경에서 젠더의학을 접목하기는 어려운 현실이다. 환자의 사회적 조건을 고려해 진료에 반영하기에는 낮은 의료 수가의 한계로 진료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서울 은평구에 위치한 살림의원은 그런 현실을 극복하고자 세워진 곳이다.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하 살림조합)이라는 협동조합 형태로 지역 주민들이 직접 병원을 운영한다. 전국에 30여곳 되는 협동조합 중 한 곳으로, '여성주의' 건강관을 표방하고 있다. 건강권에 있어서도 약자를 우선하고,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취지에서다. 여성, 성소수자, 취약계층을 배려한 진료가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 살림의원 추혜인 원장을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협동조합 형태로 병원이 운영되는 게 생소하다. 어떻게 시작된 건가.
한국은 의료 수가가 낮아 대부분 병·의원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박리다매' 전략을 세워야만 한다. 검사를 많이 하고, 처치를 많이 해야만 병원이 운영되는 것이다. 충분히 시간을 갖고 환자를 보면서도 비싼 월세를 감당하며 병원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대안이 필요했다. 때마침 '협동조합'이라는 것을 알게 됐고, 지역 주민들과 함께 조합을 꾸리게 됐다. 이 동네를 함께 살아가며 살림하고, 생명을 살린다는 의미에서 '살림의원'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충분한 진료 시간 확보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환자는 충분한 공감만으로 고통이나 불안감이 줄어들기도 한다. 또한 서울대병원의 실험 결과, 진료 시간을 충분히 확보했더니 불필요한 검사가 줄었다는 보고도 있다. 의사들은 돈을 많이 벌고 싶어서 검사를 많이 하는 게 아니다. 환자에게 직접 물어보고 집중할 시간이 없어서 검사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 충분한 진료 시간을 확보하면 불필요한 의료 소비를 줄일 수 있고, 의료비 지출도 줄어든다. 오진도 줄어든다. 진료 시간이 10%만 늘어도 오진이 크게 감소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살림조합과 살림의원은 어떻게 운영되는가.
살림의원은 의사(가정의학과·산부인과·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와 간호사, 사회복지사, 조합원이 하나의 '팀'으로 구성돼 서로 도우며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출자금을 내고 가입한 조합원은 조금 더 저렴한 가격으로 비급여 진료를 받을 수 있다. 살림의원, 살림치과 등 조합 내 의료기관은 조합원들의 출자금과 자원봉사를 통해 운영된다. 예컨대 정기적인 병원 청소를 함께하며 청소 비용을 아끼고 있다. 홍보비도 따로 필요 없다. 조합원들이 직접 바이럴 마케터가 되어 입소문을 내준다.
―조합의 형태로 운영되는 병원이 이곳 외에도 있나.
'의료생협(의료소비자생활협동조합)'이라는 형태로 실제로는 주민이 참여하지 않는 사무장 병원으로 운영되어 악용되는 사례가 있었다. 이런 이유에서 살림조합은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이는 보건복지부와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인증을 받아야만 사용할 수 있는 이름이다.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으로 운영되는 병원은 준비 중인 곳까지 국내에 서른 곳 정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해외에서는 캐나다와 일본은 의료협동조합 선진국으로, 규모가 큰 조합이 상당히 많다.
―살림의원은 '여성주의 건강관'을 기본으로 삼는다고 들었다.
살림의원은 여성주의를 의료에 접목하고자 하는 뜻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졌다. 어떻게 하면 여성주의적 가치를 지닌 의료기관을 운영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와중에 답을 찾은 게 협동조합이라는 형태이기도 하다. '여성주의'라고 하면 여성만 건강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성별과 무관한 취약계층이나 소외자들에게 차별 없는 진료를 제공하겠다는 취지를 갖고 있다. 여성과 함께 살아가는 남성들의 건강을 위해서도 여성주의적 의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성소수자를 위한 호르몬 치료도 하고 있다던데.
성소수자은 차별적 발언이나 혐오 발언을 경험하며 건강을 잃게 된다. 얼마 전 안타까운 극단적 선택 사건이 있었듯, 실제 조사에 따르면 성소수자 청소년이 이성애자 청소년보다 극단적 선택을 시도할 확률이 훨씬 높다고 한다. 주변 환경으로부터 차별적인 상황을 많이 겪을수록 그 위험성은 더욱 커진다. 그럼에도 성소수자들이 호르몬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은 아직도 드문 편이다. 살림의원은 평등한 의료권을 위해 성소수자들에게도 친화적인 병원으로 운영하고 있다.
―건강 약자들에게 의료비 지원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특히 가정폭력 피해자들은 건강보험으로 진료를 받기 어려운 분들이 많다. 건강보험 가입자가 가해자인 남편이나 아버지라면 건강보험 기록이 남아 피해자와 진료 사실을 찾아낼 수 있다는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임시 주민등록번호를 발급할 수 있기도 하지만, 절차가 몇 개월 소요되므로 당장 사용하긴 어렵다. 건강보험을 받지 못하면 진료비가 비싸다. 이런 분들을 위해서 진료비를 무료로 해드리고, 약이 필요하다면 보호 쉼터와 같이 부담하고 있다.
―성평등한 의료를 실현하기 위해 어떤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우선 의과대학의 교육 과정 변화가 필요하다고 본다. 현재 국내의 교육과정은 생물학이나 생리학에만 집중된 경향이 있다. 성별, 신분, 경제적 상황, 지위 등 환자가 처해있는 다양한 사회적 조건을 포괄적으로 살필 수 있는 교육이 추가로 논의되길 바란다. 미국에선 의사 시험 중 모의환자 테스트에서 동성애나 트랜스젠더 사례를 포함하고, 당황하면 감점시키기도 한다. 우리나라도 점점 다문화 국가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성차, 인종차, 개인차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진료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