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부인과
[젠더의학⑦] 산부인과 진료가 불쾌한 여성들… 왜?
전혜영 헬스조선 기자 | 참고서적=《혹시 산부인과 가봤어?(한국여성민우회)》
입력 2021/05/31 17:00
배려 없는 '성경험' 질문... 출산 중 수련의들 들이닥치기도
여성은 생애주기에 따라 여러 이유로 산부인과를 찾게 된다. 꼭 임신과 출산을 계획하지 않더라도 생리 주기가 불규칙한 청소년, 폐경기를 겪는 중장년 등 다양한 연령층이 산부인과 진료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한국여성민우회가 1067명의 여성에게 '산부인과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무엇이냐고 질문했더니, 상당수 여성이 '가기 싫다' '부끄럽다' '불편함' 등 부정적인 단어를 떠올렸다. 어떤 경험이 '산부인과'와 '여성'을 멀어지게 만든 걸까.
◇다리 벌린 상태로… "성경험 있는 거 맞아요?"
20대 여성 A씨는 생리불순 증상이 나타나 자궁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산부인과를 찾았다. A씨는 의사의 권유로 자궁근종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질 초음파' 검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이는 질 내부에 막대기 모양의 기구를 넣어 초음파 영상을 확인하는 검사로, 자궁·난소 등의 이상 여부를 검사하거나 임신 여부·주수 확인 등에 쓰인다. 검사 도중 질 내부에 삽입된 기구로 인해 불편감을 느낀 A씨는 '너무 아프다'며 통증을 호소했다. 돌아온 의사의 대답은 황당했다. "성경험 있으시다면서요? 아플 리가 없는데요?" A씨는 당혹감과 부끄러움을 느꼈다.
산부인과에 방문하면 대부분 '성경험 유무'에 대한 질문을 듣게 된다. 산부인과에서 성경험 유무를 묻는 것은 물론 개인의 사생활을 알고 싶어서는 아니다. 성경험이 없는 여성의 경우 질 내부를 진찰하기 위해 사용하는 '질경'을 삽입하기 어렵다. 질경을 삽입하는 과정에서 질 경계를 이루는 질주름이 손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질 초음파가 아닌 정확도가 다소 떨어지는 복부 초음파로 검사하게 된다. 이 밖에도 성경험 유무는 성경험으로 인해 감염될 수 있는 질환을 감별하거나, 진료 방향을 정하는 데도 이용될 수 있다.
이처럼 성경험을 묻는 질문은 산부인과 진료에 있어 불가피하다. 여성들도 대부분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당혹감을 느끼는 원인은 일부 의료진의 태도에 있었다. 여성민우회의 조사에 따르면 ▲다짜고짜 다른 환자들이 보는 앞에서 '성경험이 있냐'고 묻거나 ▲성경험에 대한 답변에 재차 의심하듯 질문을 반복하거나 ▲진료와 관계없는 질문을 덧붙인다거나 하는 등 사례가 있었다. 성경험을 묻는 것 자체에 당혹감을 느낀 것이 아닌, 성경험을 묻는 과정에서 배려의 부재로 인해 당혹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다. 의사의 성별이 남성이냐, 여성이냐 하는 것과는 무관했다.
◇출산 중인데… 갑자기 수련의 우르르 들어와 '깜짝'
성경험에 관한 질문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앞선 A씨의 사례처럼 성경험 유무를 통해 환자를 자의적으로 판단하거나, 성병에 걸린 환자의 성생활에 대해 지레짐작해 비난하거나, 성희롱에 가까운 질문을 던지는 의사도 있었다. 실제로 지난 2014년 국가인권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여성 환자 10명 중 1명이 진료 과정에서 성적 불쾌감이나 수치심을 느꼈다. 구체적 사례로는 ▲진료와 관계없는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상태에서 성생활이나 성경험을 물었다(25건) ▲성생활이나 성적 취향에 대한 불필요한 언급을 했다(23건) 등이 있었다. 심지어 산부인과에서는 대부분 자신의 외음부를 노출한 채로 이런 말을 듣게 된다. 엄청난 수치심이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출산을 위해 입원한 여성들에게도 불쾌했던 경험은 쏟아졌다. 불쑥 병실을 찾아와 내진(의사가 직접 외음부와 질을 관찰하는 것) 하거나, 출산 도중 환자의 허락 없이 수련의(인턴)들이 참관해 깜짝 놀랐다고 토로한 여성들도 있었다. 내진은 환자의 안전한 출산을 위해서, 수련의 참관은 미래 산모들의 안전을 위해서 필요한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당장 출산을 앞둬 당황스러운 산모에게 충분한 사전 설명 과정을 거치지 않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산부인과 의사 교육 과정에 '인권감수성' 포함해야"
한국여성민우회가 여성 1067명의 목소리를 담아 출간한 '혹시 산부인과 가봤어?'에서 메이산부인과 고경심 원장은 "대부분 산부인과 의사들이 훈련받는 의대 6년, 전공의 4~5년 과정에서 인문사회학이나 비폭력대화법 등을 접할 기회는 거의 없다"며 "여성의 프라이버시와 관련된 진료행위가 집중되는 산부인과에서는 환자의 의료정보의 비밀 보호에 특히 배려해야 한다"고 했다.
모든 국민은 의료법에 따라 환자의 권리 세 가지를 갖게 된다. 진료받을 권리, 알권리 및 자기결정권, 비밀을 보호받을 권리다. 특히 '비밀을 보호받을 권리'에 따라 환자는 진료와 관련된 신체상·건강상 비밀을 보호받아야 하며, 의료인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하며 환자에 대한 사생활을 보호해야 한다. 많은 산부인과에서 환자의 존엄을 존중하고, 불쾌감을 느끼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으나 아직도 일부 산부인과에서는 환자의 당연한 권리를 무시하고 있다.
여성들에게 '산부인과에서 바뀌었으면 하는 것'을 다시 물었다. 답변을 바탕으로 한국여성민우회는 산부인과에 제안하는 여섯 가지를 정리했다. ▲필요정보 습득 이유에 대한 사전 설명과 서면작성 ▲충분한 설명이 가능한 진료 시간 보장 ▲산부인과 의사 교육 과정에 인권감수성 교육 포함 ▲대학병원 진료에 수련의 동행에 대한 사전 공지 ▲산부인과의 과도한 상업화 관련 광고 규제 ▲지역별 최소 산부인과 병원·분만실 마련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