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젠더의학⑥] 우울과 히스테리… '여성주의 치료'의 근거

전혜영 헬스조선 기자

‘자궁의 병’ 아닌 ‘억압’의 결과… "여성주의적 관점이 여성 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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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사회·구조적인 억압이 여성을 우울하게 만든다고 말한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여성성'이 병(病)으로 여겨지던 때도 있었다. 고대부터 여성은 '히스테리(Hysteria)'라는 병을 갖고 있어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여겨졌다. 히스테리는 정신적·심리적 갈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신경증을 의미한다. '히스테리'라는 명칭 또한 자궁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히스테라(Hystera)에서 유래됐다.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는 히스테리를 자궁의 병이라고 불렀으며, 플라톤도 자궁을 방치하면 온갖 질환을 일으킨다고 했다.

현대에선 어떨까. 19세기 프랑스의 신경병리학자 마틴 샤르코가 히스테리는 남성에게도 나타난다고 주장하면서 신경증은 여성만의 것이 아니게 됐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은 '노처녀 히스테리'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며 여성에게 특유의 신경질적인 특성이 있다고 말한다. 여성은 남성보다 정신질환에 취약한 것으로 보고되는데, 일부 전문가들은 생물학적 원인보다도 사회학적 원인이 크게 작용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를 기반으로 여성의 심리를 치료하기 위한 '여성주의 치료'도 대두된다.

◇여성이 더 우울한 이유… '사회적 구조'가 원인?
'여성 심리학'은 들어 봤어도, '남성 심리학'은 들어본 적 없을 것이다. 왜 여성의 심리만을 따로 분류해 연구하는 것인지 궁금증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 여성 심리학은 먼 과거부터 지속적으로 이뤄져 온 여성에 대한 사회적 억압을 탈피하고 보다 평등한 사회를 실현하고자 여성의 심리를 연구하는 학문 분야다. 1960년대 서구에서는 여성주의 운동이 시작됐고, 현대에 이르며 여성의 억압과 불평등은 상당히 개선됐다. 그러나 겨우 50년 만에 여성이 억압으로부터 완전히 탈피됐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게 여성심리학자들의 중론이다. 최근 성별 구도 심화로 남녀 간 갈등이 악화되고 있는 것도 여성 심리학이 다루는 중요한 의제 중 하나다.

실제로 여성은 남성보다 더 우울하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20년 우울증으로 진료받은 여성은 51만5175명, 남성은 25만6421명으로 여성 환자가 남성 환자보다 2배 이상 많았다. 반유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사회학적으로 여성이 반복적으로 겪어온 구조적 억압이 여성의 정신질환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며 "생물학적, 사회학적 원인이 한 가지만 작용했다기보다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여겨진다"고 말했다. 중앙대 심리학과 이민아 교수 또한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사회가 여성을 우울하게 만든다"며 "여성에게 더 많이 지워진 가사노동과 양육부담, 직장과 가정에서 완벽하기를 요구받는 상황 등이 대표적 원인"이라고 했다.

◇심리학계·의학계, 환자 치료에 '여성주의' 고려해야
여성이 더 우울한 원인이 '사회적 구조' 때문이라면, 여성의 정신질환 치료에도 사회 구조를 반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의학계에 앞서 심리학계에서는 '여성주의 상담' 개념을 먼저 도입했다. 이는 여성의 정서적인 문제들이 많은 부분 우리 사회의 성차별주의로 인해 야기된다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억압된 성 역할을 벗어던지며 자신에 대한 건강한 생각을 가질 수 있게 돕는 상담적 접근 방법이다. 여성주의 상담에서는 여성이 겪고 있는 정신적 증상은 단순한 질병이 아니라, 사회에서 저항하고 생존하기 위한 표현 방법이라고 여긴다.

의학계에서도 일부 전문의들은 여성주의적 치료 관점을 도입하고 있다. 여성 환자들의 심리패턴을 더욱 잘 파악하고자 하는 의지로 여성학을 함께 전공한 반유화 전문의는 "환자가 단순히 화가 많아서가 아닌, 사회 구조나 반복적인 억압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됐다"며 "사회 구조적 문제로 인한 고통을 자기 탓으로 돌리지 않도록 하는 방향으로 환자를 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반 전문의는 "여성주의적 관점은 여성 환자의 치료 효과를 높이는 데 분명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오해하면 안 될 것은, 여성주의 치료가 환자에게 여성주의를 강요하거나 '어떻게 행동하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의사는 절대로 환자에게 "당신이 힘든 건 전부 사회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환자가 과도하게 스스로를 책망하며 고통받지 않도록 격려한다. 당연한 말 같지만, 환자 입장에서는 당연하지 않을 때가 많다. 반유화 전문의는 "구조나 억압 문제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면 자기 자신에게 화살을 돌릴 수 있다"며 "여성주의 치료는 그런 환자들에게 자신에 대한 의심을 덜어줄 수 있다"고 말했다.

◇전통적 성 역할로 고통받는 '남성'에게도 도움
여성주의 치료는 '여성'에게만 필요하다고 착각하기 쉽다. 전문가들은 여성주의 치료가 여성의 정신건강뿐 아니라 남성의 정신건강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 보고 있다. 남성들은 세상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반유화 전문의는 "여성주의는 여성에 대한 이슈를 넘어, 인간 보편에 대한 이슈이기도 하다"며 "여성주의적 관점은 전통적인 성 역할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남성 환자를 볼 때도 많은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반유화 전문의에 따르면 남성들은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을 고립시키고 도움 요청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한편 최근 성별 갈등이 심화되며 '여성주의' '페미니즘' 등 단어 자체에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 반 전문의는 "여성주의를 아주 멀리 있는 것, 무조건 받아들이거나 배제해야 할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일상에 스며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했으면 한다"며 "일상에서 겪는 내적 갈등의 근본적 원인을 깨닫는다면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도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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