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젠더의학④] '정신병' 오해 벗은 성소수자들... 그러나 아직 먼 길
전혜영 헬스조선 기자
입력 2021/05/06 08:10
WHO·美정신의학회, "정신질환 아니다"
잠시, 6년 전으로 가보자.
"한국에서 트랜스젠더의 의료접근성에 대한 논의는 전무하다"
지난 2015년 학술지 《보건사회연구》에 고려대 보건과학대 연구팀이 발표한 논문의 첫 문장이다. 헌법 제11조에 따라 모든 국민은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차별받아선 안 된다. 그러나 성소수자들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은 '의료'에 있어 현실이었다. 성소수자, 특히 성별 전환이 필요한 트렌스젠더에겐 여러 종류의 의학적 처치가 필요하지만 국내서 이들을 위한 의료기관은 전무했다. 성소수자들은 감기나 당뇨병 등 일반적 진료를 받기도 어려웠다.
2020년대엔 달라졌을까. 국내서도 최근 대학병원 내에 젠더클리닉이 개설되거나, 차별금지법이 논의되는 등 변화의 바람이 분다. 이제 ‘의료접근성에 대한 논의 전무’라는 6년 전의 판정을 한 때의 시대착오로 치부해도 좋을까.
◇WHO·美정신의학회, "동성애와 성별위화감은 질병 아니다"
동성애, 양성애,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은 나라마다 크게 다르다. 다만 전 세계 대부분 나라에서 의학적 입장은 의료 선진국인 미국을 따르는 만큼, 미국 의학계에서 성소수자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보자. 미국정신의학회(APA)는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DSM)'을 정신질환을 위한 주요 판단 근거로 쓰고 있다. 국내 정신의학계에서도 DSM을 편람으로써 사용한다. 1974년, DSM-3에서는 동성애가 질병 분류에서 완전히 삭제됐다. 이전까지 정신질환이었던 동성애가 '정상 상태'로 분류된 것이다.
트랜스젠더가 느끼는 '성별위화감(gender dysphoria)' 또한 2013년 개정된 DSM-5에서 질병 상태가 아닌 것으로 변경됐다. 성별위화감이란 출생 시의 법적 성별과 본인이 인지하는 성별이 불일치함에 따라 생기는 불쾌감을 말한다. DSM은 개정 전까지 이를 '성주체성장애'라고 명시했으나, 개정과 함께 성별위화감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DSM은 트랜스젠더가 느끼는 정체성 자체는 장애가 아니지만, 성별위화감으로 인해 트랜스젠더가 느낄 수 있는 고통(우울감 등)에 대해서는 의학적 진단과 치료가 필요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2018년 세계보건기구(WHO) 또한 국제질병분류 제10판(ICD-10)에서 트랜스젠더 관련 항목을 전부 삭제했다. 기존에 정신질환으로 분류됐던 '성별불일치' 항목은 '성적 건강 관련 상태'로 변경돼 분류됐다. 당시 발표에 따르면 WHO는 "트랜스젠더가 더는 정신장애가 아니라는 점은 명백하며, 그렇게 정의하는 일은 트랜스젠더에 대한 엄청난 사회적 낙인을 유발할 수 있다”며 "트랜스젠더에 대한 사회적 인식 개선과 더불어 더 나은 의료서비스가 필요하다"고 했다.
◇국내 트랜스젠더 35.9%, "의료기관에서 차별 경험했다"
미국 의학계의 입장이 바뀌었다고 해서, 단숨에 성소수자를 위한 의료 수준이 개선되지는 않았다. 조사에 따르면 미국과 캐나다 의대 중 절반 정도만 성소수자 관련 교육이 이뤄진다. 트랜스젠더의 성전환 수술 또한 차별금지법에 따라 최근 들어서야 의료보험 보장 항목에 추가되고 있다. 아직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저조한 국내 상황은 더욱 좋지 않았다.
국가인권위원회가 트랜스젠더 90명 이상을 대상으로 조사해 발표한 '성적지향·성별정체성에 따른 차별 실태조사'에 따르면 트랜스젠더의 35.9%는 "의료기관에서 차별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의료적 트랜지션(성전환 수술 혹은 시술)을 받기 위해 의료기관에 방문한 적 있는 사람(51명) 중에서도 28명이 "의료인이 성전환 관련 의료 조치에 관한 지식이 부족해 다른 병원을 알아봤다"고 답했으며, 10명은 "의료인 측으로부터 성전환 관련 의료 조치를 거부당했다"고 답했다.
또한, 2017년 고려대 보건과학대 연구팀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정신과 진단을 받지 않은 트랜스젠더 중 일부(28%)는 "제대로 진단해 주는 정신과를 찾을 수 없어서 (성별위화감) 진단을 받지 않았다"고 답했다. 국내 의료기관에서는 성별위화감을 느낀다는 정신과 진단이 있는 경우에 한해 호르몬 치료, 성전환 수술 등 의료적 트랜지션을 진행한다. 정신과 진단이 없어서 호르몬 치료를 받지 못했거나, 호르몬 요법을 제공하는 의료기관이 없어서 호르몬 치료를 받지 못했다고 답한 사람도 있었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의료 서비스 부족은 이들의 건강을 직접적으로 해치는 원인이 된다. 트랜스젠더 호르몬 치료를 진행하는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하 살림의원) 추혜인 원장은 "최근 성소수자들의 극단적 선택 사례가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며 '성소수자가 겪는 차별적, 혐오적 발언은 그들의 건강을 직접적으로 위협한다”고 말했다. 실제 해외에서 성소수자의 경우, 성소수자가 아닌 사람보다 정신질환을 앓거나 극단적 선택을 할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 연구 결과가 다수 보고되고 있다. 앞서 국민인권위원회 조사에서도 국내 트랜스젠더 10명 중 6명은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대학병원 '젠더클리닉' 등장, 국내서도 성전환 수술 가능해져
아직 부족한 실정이기는 하지만, 트랜스젠더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병원이 조금씩 늘고 있다. '성소수자의학(gender transition medical)'을 도입해 평등 의료를 실천하고 있는 의료계 전문가들이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살림의원 추혜인 원장 외에 순천향대서울병원 산부인과 이은실 교수도 트랜스젠더를 위한 호르몬 치료를 시행하는 의사로 유명하다.
그간 트랜지션을 제공하는 몇몇 병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차별의 그늘에 가려져 관련 정보를 얻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올해 고대안암병원이 대학병원 최초로 성소수자를 위한 다학제 젠더클리닉을 꾸려 이목을 끌었다.
고대안암병원 젠더클리닉 황나현 교수(성형외과 전문의)는 "젠더클리닉은 단지 트랜스젠더만을 위한 곳이 아니다"라며 "선천적 성염색체 질환, 간성, 생식기 이상 등 여러 성별 관련 질환자들에게 가장 적합한 의료를 제공하기 위한 곳"이라고 말했다. 이어 황 교수는 "의료적 트랜지션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성과 생각하고 있는 성이 다르다는 진단을 받는 게 우선"이라며 "진단 과정을 거쳐 환자가 확신을 갖게 된다면 의사에 따라 호르몬 치료, 수술 등을 제공한다"고 말했다. 고대안암병원 젠더클리닉은 성소수자가 위화감 없이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의료진의 차별적 발언을 지양하고, 분리된 탈의실을 마련하는 등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과거 '성전환수술(성별적합수술, Sex Reassignment Surgery, SRS)'을 원하는 트랜스젠더는 대부분 태국 등 해외로 나가서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일부 병원에서 성전환 수술을 해오긴 했으나, 고가인데다 태국만큼 수술 경험이 많지 않아 오히려 신뢰하기 어려웠다. 해외서 수술만 받고 돌아오다 보니 문제가 많았다. 황나현 교수는 "성전환 수술은 매우 민감한 부위를 수술하는 것이므로 지속적인 경과관찰이 반드시 필요하다"며 "수술만 하고 한국에 돌아와 부작용으로 본원을 찾는 환자분들이 많다"고 말했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출국조차 어려워진 상황, 고대안암병원 젠더클리닉은 해외 연수를 다녀온 전문 의료진이 성전환수술까지 시행하고 있다.
성전환수술은 '생식기 재건 수술(Bottom Surgery)' 만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황나현 교수는 "성전환 수술은 남성의 상징인 갑상선 연골(목젖) 제거술, 가슴 성형술, 얼굴 골격 성형술 등 개개인에 맞춘 다양한 수술까지 포함되는 개념"이라며 "성형외과, 정신건강의학과, 비뇨의학과, 산부인과, 내분비내과, 가정의학과 의료진이 협력해 최대한 안전한 트랜지션이 이뤄지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현재 '법적인 성별 정정'은 생식기 재건 수술을 받은 사람만 가능하다. ▲성별위화감에 관한 정신과 전문의 진단서 ▲성전환시술 의사의 소견서 ▲생식능력이 회복될 수 없음을 증명한 진단서 ▲성장환경진술서 ▲2명 이상 지인의 보증서 ▲부모 동의서를 모두 제출하고, 심의를 거쳐 법원의 허가를 받은 경우에만 성별 정정이 가능해진다.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중 첫 번째 숫자가 바뀌는 것이다.
◇서울대 의대 '성소수자 의료' 수업 열려… 변화의 바람 분다
국내 학계에서는 '성소수자의학'의 필요성이 조금씩 대두되고 있다. 그동안 의과대학과 산부인과·성형외과 레지던트 수련 과정에서는 성소수자 관련 교육이 전무했던 상황, 올해 서울대 의대 1학기 수업으로 '성소수자 건강권과 의료'라는 수업이 개설됐다. 서울대 의대 휴먼시스템의학과 윤현배 교수가 주도한 이 수업에는 서울대 의대 본과생 12명이 참여했다.
수업 기획과 강의에 참여한 추혜인 원장은 "차별과 혐오는 건강에 어떤 악영향을 미치는지, 해외서는 어떤 방식으로 성소수자 친화 의료를 제공하는지, 진료실에서 성소수자를 만나면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실제 성소수자들에게 필요한 진단과 처치는 무엇인지 등을 배우는 수업이었다"며 "모의환자 진료를 통해 환자 사례를 경험해보기도 했다"고 말했다. 추 원장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실제 의사 면허 시험에 성소수자 환자 사례를 포함하기도 한다. 수업은 성황리에 끝났으며, 혹시 정원이 차서 수업을 듣지 못할까 걱정하는 학생도 있었다는 후문이다.
추혜인 원장은 "성소수자를 위한 의료 서비스를 개선하기 위한 시도들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며 "성소수자 클리닉 의료진이 모인 비공식 진료 모임이 이뤄지거나, 정신건강의학과에서도 성소수자 친화적인 진료실을 만들기 위한 고민 등이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황나현 교수는 "해외에서는 이미 성소수자 의료가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추세이며, 2년에 한 번 열리는 큰 학회도 있다"며 "국내엔 아직 학회 차원의 움직임은 없지만, 만들려는 계획은 있다"고 말했다.
추혜인 원장은 "의학은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으며, 발전을 위해서는 과거의 생각을 뒤집어야 할 때도 있다"며 "현대 의학이 히포크라테스 시대의 의학을 따르지 않듯, 진정한 의미의 의학 발전을 위해선 때론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