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품회사 마케팅팀에 다니는 최영란씨(여·35)는 얼마 전 회식자리에서 주량이 상당히 약해졌음을 깨달았다. 전에는 맥주 2병도 거뜬했는데, 요즘 들어 와인 한 잔만 마셔도 어지럽고 귀가 멍멍하고, 숨이 가빠서 어딘가에 주저앉아 쉬지 않으면 잘 걸을 수가 없었다. 직장 건강검진에서 혈색소(헤모글로빈) 수치가 정상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철결핍성 빈혈’을 진단받은 그녀는 자신의 음주실력 약화가 빈혈 때문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게 됐다.

경미한 빈혈이 있어서 일상생활에선 큰 불편을 못느낀다 하더라도 음주를 즐긴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 호흡곤란, 어지럼증, 두통 등의 증상을 악화시키고 심할 땐 산소부족으로 쓰러질 때도 있다.

술 마실 때 이처럼 빈혈 증상이 악화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알코올이 철분을 비롯한 혈액의 주요 성분들의 흡수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삼성서울병원 혈액종양내과 정철원 교수는 “술은 철분, 엽산, 비타민B6 등 헤모글로빈을 만드는 성분들의 흡수를 방해하여 빈혈 증상을 더 악화시킨다”며 “간 질환이 있는 환자의 절반 정도에서 적혈구내 엽산 농도의 감소를 볼 수 있고, 비타민B6 결핍은 빈혈 증세를 갖고 있는 알코올 중독자의 25%에서 발견된다”고 말했다.

둘째, 알코올 분해시 산소 요구량이 더 증가하기 때문이다. 알코올질환전문 다사랑병원 전용준 원장은 “1분자의 알코올을 분해하기 위해서는 3분자의 산소가 필요하다”며 “술을 마시면 몸 속의 산소가 알코올 분해에 사용되기 때문에 두뇌로 가는 혈중산소가 부족해진다”고 설명했다.

셋째, 장기적으로 봤을 때 음주는 피를 만드는 골수의 생산능력 자체를 저하시킬 수 있다. 아주대병원 종양혈액내과 박준성 교수는 “알코올은 골수를 지방세포로 변화시키는 부작용이 있다”며 “조혈세포가 수적으로 줄어들면 당연히 피의 생산이 줄어들어 빈혈을 악화시킨다”고 말했다.

빈혈이란 혈액 중의 헤모글로빈 또는 적혈구 양이 줄어들어 산소 운반능력이 저하된 상태를 말한다. 철결핍성 빈혈이 전체 빈혈의 90% 가량을 차지할 정도로 대표적이다. 특히 매달 월경을 통해 다량의 혈액을 배출하는 여성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철결핍성 빈혈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철결핍성 빈혈은 먹는 양보다 배출되는 양이 많아서 생기므로 철분 제제를 5~6개월 정도 복용하면 좋아진다. 이렇게 해서 몸 속 ‘철분 은행’에 잔고가 많을 땐 빈혈이 없어지지만 저축된 철분이 바닥나고 다시 지출이 많아지면 빈혈증상이 생기게 된다. 전문가들은  “폐경 전까지는 철분제 복용을 간헐적으로 반복함과 동시에 계란, 생선, 우유, 콩, 녹황색 야채 등 조혈식품을 꾸준히 섭취하고, 지나친 음주는 자제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한다.

/이현주 헬스조선 기자 jooya@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