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6-11-30

과거엔 이발사가 외과수술시행

이발소에서 돌고 있는 청홍백 삼색의 나선형 무늬봉은 원래 외과의사의 간판이었다. 푸른색은 정맥을, 붉은색은 동맥을, 그리고 흰색은 신경을 나타냈다고 한다. 외과 의사 간판이 이발소의 상징이 되기까지는 수백 년에 걸친 의료계 내부의 다툼이 있었다.

분쟁의 발단은 의과대학의 교육과정 개편이었다. 13세기 중엽 유럽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던 파리의과대학이 정규 교육과목에서 외과학을 제외시켜버렸던 것이다. 상류 계층의 의료를 주도하는 대학의 의사 양성에는 철학과 같은 교양과목을 강조할 필요가 있으며, 외과와 같이 천박한 기술적인 일은 일반 민중의 의료를 담당하던 이발사들에게 맡기면 충분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자 점차 이를 본받는 대학들이 늘어났고, 대학을 졸업한 의사는 외과를 하지 않는다는 미묘한 차별적 전통이 확립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피를 뽑거나 상처를 꿰매거나 고름을 짜는 것은 의사가 아니라 이발사들이 담당하는 천한 일이라는 인식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외과를 주업으로 삼던 대학 출신의 의사들은 이런 위기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단결하였다. 파리뿐 아니라 런던, 에든버러, 브뤼셀, 안트워프 등지의 외과의사들은 독자적으로 의과대학 과정을 개설하여 제자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여기서는 대학과 마찬가지로 라틴어로 수업을 했고 해부학도 가르쳤으며 작업의 편의를 위해 짧은 가운을 입고 있었던 이발사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졸업생들은 긴 가운을 입었다.

그러자 내과의사들이 주축을 이루는 대학 측은 새로운 수법으로 반격에 나섰다. 대학에 이발외과의사를 양성하는 속성 과정을 부설하고 과정을 수료하는 자에게 외과의사의 자격증을 마구 나누어준 것이다. 일반인들의 외과에 대한 평가를 혼란 시키려는 이 시도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더구나 이발외과의사들은 이 기회에 자신들의 간판을 피와 고름을 받는 그릇에서 청색과 백색의 나선무늬 봉으로, 또 얼마 후에는 청홍백색으로 된 삼색 나선 표시로 바꾸어버렸다. 사람들은 이윽고 대학을 나온 정규 외과의사와 돌팔이 이발외과의사를 구별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18세기 초 파리대학에서 외과를 다시 정식 교과목으로 채택함으로써 근대적인 외과가 시작되고 외과가 천한 직업이라는 인식은 사라지게 된다. 그렇지만 이 오래 걸린 투쟁 덕분에 대학을 나온 훌륭한 외과의사임을 나타내던 삼색 나선무늬 봉이 엉뚱하게도 머리나 수염을 손질해주는 현대의 이발소 앞에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울산의대 인문사회의학과 교수

* 본 기사의 내용은 헬스조선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야기 의학사

[울산 의과 대학교]
이재담 교수

서울대 의과대학
일본 오사카 시립대학 박사
미국 하버드 대학 과학사학교실 방문교수
현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인문사회의학교실 교수

의학의 역사를 이야기형식으로 재미있게 소개하는 이재담교수의 의학사 탐방코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