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8-05-23
자신을 살린 여드름 소녀의 용기
얼굴 가득 여드름이 핀 18세 여고생이 어머니와 같이 병원에 왔다. 무척 밝은 성격이었으며, 말을 하고 난 뒤 배시시 웃는 모습이 참 천진난만하고 귀여웠다.
병원을 찾게 된 이유는 1년 전부터 항문에서 계속 피가 나기 때문이라고 했다. 혈변을 본다면 치질이든 다른 대장질환이든 이미 어느 정도 진행되었음을 의미한다. 좀 더 정확한 진단을 위해 가족 중에 아프신 분이 있는지 물었다.
“제가 세 살 되던 해 아버지께서 대장암 수술을 받으셨대요. 하지만 3년 만에 돌아가셨고, 그 후로 쭉 엄마와 단 둘이 살고 있어요.”
혈변과 가족력은 대장질환의 대표적 적신호이기에 대장내시경 검사를 받아볼 것을 권했다. 그러자 함께 온 어머니가 “저도 피가 나와서 검사해 본 적이 있는데 그저 단순한 치질이었다”며 “이제 열여덟 살 밖에 안 된 여고생한테 너무 과잉진료 하는 것 같다”고 언짢아했다.
가족 중에 암환자가 있는 경우엔 유전될 수 있으므로 젊은 나이더라도 대장내시경으로 검사해 보는 것이 좋다고 설득했지만 어머니는 계속 망설였다. 그 때 여드름 여고생이 어머니의 팔을 꽉 잡으며 당차게 말했다.
“엄마, 어려운 일도 아닌데 왜 그래? 나 검사 받을래.”
그렇게 해서 수업 없는 토요일에 대장내시경 검사를 시행했다. 그런데 검사 도중 소녀의 대장 속에서 1cm부터 4cm 사이의 다양한 용종이 19개나 발견됐다. 발견된 용종을 내시경 절제술로 모두 제거한 후 조직 검사를 했더니 그 중 한 개에서 암세포가 발견되었다. 다행히 점막에 국한된 조기 대장암이라서 3개월 후에 한번, 그로부터 6개월 후에 한번, 그 이후로는 1년에 한번씩 대장내시경 검사로 병의 진행이나 새로운 용종의 발생만 잘 확인하면 될 정도였다. 여드름 소녀의 당돌함이 자신의 생명을 구한 셈이었다.
용종이 반드시 암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암은 용종에서 시작된다. 때문에 용종의 조기발견 및 치료는 대장암과 직장암 예방에 무척 중요하다. 대장암이 될 가능성이 높은 용종 중에 ‘가족성 용종증’이라는 증상이 있다. 이것은 염색체 특성에서 비롯된 유전 질환으로서 항문에서 대장조직 전체에 걸쳐 100개 이상의 수많은 용종이 발생하는 것이 특징이다. 여드름 소녀가 어린 나이에 많은 용종이 생긴 것 역시 이 질환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가족성 용종증의 유전 확률은50%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환자의 형제나 자녀는 10대부터 정기적으로 대장내시경 검사를 받는 것이 좋다. 일단 용종이 발생하면 100% 대장암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가족성 용종증의 조기진단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정기적인 검진이다. 가족병력이 있으면 15세 무렵에 대장내시경 검사를 받는다. 이후에도 대략 5년 주기로 45세까지 검사를 시행한다. 40세 이후에도 용종이 발견되지 않으면 일단 안심해도 된다.
둘째는 유전자 검사 방법이다. 가족성 용종증 유전인자는 다섯 번째 상염색체에 있으므로 이를 조사하여 잘못된 유전인자가 있는지 미리 알아보는 것이다. 이를 통해 유전자상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면 대장내시경 검사를 줄일 수 있다.
가족성 용종증의 치료는 용종이 암으로 변하기 전에 대장을 절제하는 수술을 시행하는 것이다. 가족성 용종증 증상이 발견되면, 20세 전후, 늦어도 25세 이전에 수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장암 발병율이 20세에는 0.6%인 반면, 25세에서는 4%, 30세에서는 13%, 35세에서는 23%, 40세에서는 37%로 급격히 증가하기 때문이다.
한솔병원 / 이동근 원장
부끄럽다는 이유로 쉬쉬하는 치질과 변비. 환자 사례로 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