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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AI 생성 이미지
32세 남성 A씨는 3년 전부터 탈모약을 복용해왔다. 실제 탈모를 진단받은 건 아니지만 미리 복용해야 머리카락을 지킬 수 있다는 주변의 조언이 있었기 때문. 매번 병원에 가서 약을 달라고 의사를 설득하는 게 번거로웠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비대면 진료 덕분에 편하게 약을 처방받을 수 있었다. 한편, 그는 1년 전 결혼한 후 임신을 준비해왔는데 실패를 거듭해 최근 비뇨의학과에에 방문했다. 검사 결과, 정상 대비 정자 수가 감소한 것으로 확인됐다. 의료진은 예방차 먹은 탈모약을 원인으로 지목했다.

최근, A씨처럼 탈모를 예방하기 위해 탈모약을 복용하다가 난임에 이르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는 지적이 의료계에서 나왔다.

◇탈모 예방하려 약 먹다가 난임
탈모약을 복용하다가 남성호르몬 수치가 급감하거나 난임에 이르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 남성 난임 증가는 전 세계적인 추이지만 국내에서는 탈모를 예방하기 위해 무분별하게 약을 복용하다가 난임에 이르는 남성들이 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부산대병원 비뇨의학과 박현준 교수는 “최근 탈모가 아닌데도 탈모약을 먹다가 정자 수가 감소하는 젊은 남성 환자들이 많아졌다”며 “탈모약은 약한 전립선비대증 치료제라고 이해하면 되는데 무분별하게 복용하면 남성호르몬을 감소시키거나 난임을 유발할 수 있다”고 말했다.

피나스테리드·두타스테리드 성분의 탈모약은 남성호르몬이 DHT(디하이드로테스토스테론)로 변환되는 걸 억제해 탈모를 치료하지만, 성 기능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탈모약은 예방적 복용이 권고되지 않는다.

중앙대병원 피부과 김범준 교수 역시 “탈모약은 미리 복용한다고 해서 예방 효과를 내지 않는다”며 “부작용에 대한 리크스는 똑같이 감수해야 하는데 탈모약은 전립선비대증과 전립선암 표시 인자인 전립선특이항원(PSA) 확인을 어렵게 만들기도 해서 정확한 진단 후에 복용해야 하는 약”이라고 말했다.

◇“비대면 진료가 탈모약 복용 부추겨”
의료진들은 비대면 진료가 탈모약 복용을 쉽게 만들었다고 보고 있다. 탈모약은 전문의약품으로 의사의 처방이 필요한데, 비대면 진료는 의사와 환자가 직접 마주하지 않는 탓에 비교적 쉽게 진단과 처방이 이뤄진다. 2020년 2월, 코로나19로 병원 방문이 어려워졌을 때 한시적으로 허용됐던 비대면 진료는 2024년 2월, 전공의 이탈 이후엔 의료공백을 메우기 위해 초진도 가능하게 변경됐다.


익명을 요구한 한 비뇨의학과 의사는 “환자를 직접 보고 자세히 관찰한 다음에 탈모약을 처방해야 하는데 비대면 진료를 하면서 쉽게 처방하는 의사들이 많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박현준 교수도 “실제 예방 차원으로 탈모약을 복용하는 환자들에게 어디 병원 다니느냐고 물었더니 백이면 백 비대면으로 처방받았다고 한다”고 말했다.

비대면 진료가 ‘처방 자판기’로 활용되고 있다는 건 수치상으로도 드러난 바 있다. 실제로 지난해 2월 비대면 진료가 전면 허용된 이후 탈모약과 여드름 치료제의 처방 건수가 늘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집계한 탈모약(피나스테리드·두타스테리드 성분 의약품 전체) 처방 건수는 지난해 2월 1303건에서 10월 4329건으로 세 배 이상 증가했다.

김범준 교수는 “대부분 전화로 진행되는 비대면 진료에서 비급여인 탈모약은 무분별하게 처방되는 경향이 있다”며 “쉽게 처방한 의료진도 잘못했지만 그걸 가능하게 만든 비대면 진료 시스템도 손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부작용·오남용 위험 큰 의약품은 비대면 처방 금지를
현재 비대면 진료는 법제화 기로에 놓여 있다. 새 정부가 비대면 진료 법제화를 공약으로 내세운 뒤 국회에서 관련 법안들이 나오고 있다. 최근 여당에서 ‘성인 재진 환자’ 중심의 제한적 비대면 진료만 허용하는 개정안을 발의하면서 플랫폼 업계의 반발이 예상되는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비대면 진료를 폭넓게 허용하더라도 부작용 우려가 일부 비급여 의약품은 처방을 제한해야 한다고 말한다. 보건복지부는 앞서 향정신성의약품과 사후 피임약, 비만 치료제 등 부작용·오남용 우려가 큰 의약품에 대해 비대면 진료로 처방을 금지한 바 있다. 김범준 교수는 “호르몬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약물은 비대면 진료에 의한 처방을 제한해야 한다고 본다”라며 “환자 편의를 내세워서 초진·재진 중심의 논의를 이어가기 보다는 정책을 세심하게 짜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