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홧김에 마시다보니… 술냄새 싫어 몇번씩 양치질"
정시욱 헬스조선 기자
입력 2009/04/21 22:15
늘어나는 '나홀로 음주'… 알코올 중독 초기 김모씨
실직 4개월만에 '폐인' "사람 만나면 자존심 상해"
전화 꺼놓고 숨어 음주
"퇴직을 당한 이틀 뒨가, 친구와 술 마시며 멱살을 잡고 싸웠습니다. 친구는 걱정해 준다고 이런 저런 얘기를 해 줬는데 듣기 싫어 미치겠더군요. 그 다음에도 술만 마시면 사람들과 멱살잡이를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내 처지를 이야기하는 것도, 동정을 받는 것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혼자 술 마시게 되었습니다."
17년간 다닌 회사에서 지난해 12월 정리해고된 실직자 김모(42)씨의 집을 찾았다. 알코올 중독 초기 증상을 보인다는 의사의 '제보'와 달리 겉보기엔 멀쩡했다. 4개월 새 몸무게가 10㎏가량 빠졌다고 했지만 외모는 멀쩡했다. 입에서 술 냄새도 나지 않았다.
눈을 맞추려 하지 않고 연방 손톱을 깨무는 것만이 조금 남달랐다. 말을 떼기가 어색해 "차 한잔 하러 나가자"고 했더니 대뜸 "술 한잔 하자. 다른 사람과 술잔을 기울인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순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잠깐 망설이는데 "사람들 보기도 그렇고 그냥 집에 있겠다"며 더 어두운 컴퓨터 방으로 안내했다.
혼자 마시는 술 맛은 어떨까? 김씨는 "한마디로 사약(死藥) 마시는 기분이다. 술 마시는 것 아니면 딱히 할 일이 없어 마시는데 한두 잔 마시다 보면 술이 술을 먹는다. 솔직히 맛은 없다. 술 냄새가 싫어 하루 5번 이상 양치질을 한다"고 말했다. '혼자 술 마시기 시작한 또 다른 이유'로 그는 "퇴직을 당한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데 한강변에 앉아 소주를 병째 마시는 TV 드라마 장면들이 생각났다. 그렇게 하면 왠지 폼도 나고 기분도 풀릴 것 같아 따라 해 봤는데 하나도 좋지 않았다. 그 다음부턴 집에서만 마신다"고 말했다.
김씨는 처음 1주일은 집에서 푸짐하게 안주를 차려 놓고 소주잔에 따라 마셨다고 한다. 그러나 실직을 당한 처지에 안주까지 챙겨 먹는 자기 모습이 '청승맞게' 느껴져 그 이후엔 안주도 없이 맥주잔에 따라 마신다고 했다. 그러나 아직 '병 나발'을 불지는 않는다고 했다.
혼자서 술을 마시면서 김씨는 '다른 사람'이 돼 갔다. 우선 바깥 출입이 뜸해졌다. 요즘은 저녁 9시쯤 소주 사러 수퍼마켓에 가는 것이 유일한 외출이라고 했다. 사람들을 만나면 '지금 뭐하냐'는 질문을 들을까봐 어두울 때 나간다고 했다. 사 온 술을 숨기는 버릇도 생겼다. 그는 여행용 가방 속에 숨겨 둔 소주 4병을 살짝 보여주었다. 말수도 줄었다. 보험 설계 일 나가는 부인과 고등학생 아들과도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 집에 혼자 있을 땐 형광등 불도 끄고, 집 전화, 휴대전화 모두 꺼놓는 습관이 생겼다.
인터뷰를 하기 전 김씨의 부인과 전화 통화를 했다. 부인 말에 따르면 김씨는 원래 술을 많이 마시는 타입이 아니었다. 마케팅 부장인데도 월 1~2회 회사 전체 회식을 빼곤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런데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월급이 안 나오고 이 때문에 불안, 초조, 우울, 가족에 미안한 감정이 밀려들고, 잠도 이루기 힘들어 '약'처럼 술에 입을 대기 시작했다고 한다. 부인은 "성실하고 반듯했던 사람이 실직 이후 혼자 술 마시면서 180도 변했다. 전혀 다른 사람과 사는 것 같다"고 했다.
가족 이야기를 꺼내자 김씨의 안색과 눈빛이 달라졌다. "미안할 뿐"이라며 맥주잔 가득 따른 소주를 단번에 들이켰다. 그러더니 "19번째 결혼기념일을 이틀 앞두고 (회사에서) 잘렸다"며 흥분을 했다. 화가 풀리지 않는지 소리를 지르며 옆에 있던 물건들을 내던졌다. 온순했던 첫인상은 온데간데 없었다. 영락없는 알코올 중독자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았고, 이내 '평정'을 찾았다.
그는 "이런 모습을 보여 미안하다. 나도 술을 마시기 싫다. 이러다 정말 폐인이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머리에선 술 생각을 지웠는데, 손은 술잔에 가 있다. 날 좀 도와 달라. 술 끊는 약이라도 있으면 꼭 좀 연락해 달라"고 했다. "중독 증상에서 혼자 헤어나오기는 쉽지 않으니 빨리 전문의의 도움을 받으라"고 충고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스트레스나 회사 일을 핑계 대며 거의 매일 술을 마시는 평범한 직장인들과 김씨의 차이는 종이 한 장도 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