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팬데믹’ 항생제 내성]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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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이미지./사진=클립아트코리아
전 세계를 멈춰 세웠던 코로나19가 ‘눈에 보이는 팬데믹’이었다면, 지금 우리 곁에는 소리 없이 스며드는 또 다른 재앙이 예고돼 있다. 바로 ‘항생제 내성’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조용한 팬데믹(Silent Pandemic)’이라 부른다. 당장 눈앞에서 환자가 격리되고 일상이 멈추는 극적인 변화는 없지만,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우리 몸과 사회를 내성균의 화약고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CRE 감염증 사망자, 4년 새 네 배 폭증
의료계에 따르면 ‘카바페넴 내성 장내세균목(CRE) 감염증’ 사망자 수가 증가하고 있다. 2020년 226명이었던 CRE 감염증 사망자 수는 지난 2024년 838명으로 급증했다. CRE 감염증은 최후의 항생제라 불리는 ‘카바페넴계 항생제’에 내성을 가진 장내 세균을 가리킨다. 이에 감염된 환자는 항생제가 듣지 않아 요로감염 등으로 인한 사망 확률이 높아진다. 나머지 주요 항생제 내성균인 메티실린 내성 황색포도알균(MRSA), 반코마이신 내성 장알균(VRE), 다제내성 아시네토박터 바우마니균(MRAB) 등에 감염된 환자까지 합치면 더 많은 사망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질병관리청은 항생제 내성으로 인한 국내 사망자가 2021년 약 2만2700명으로 추산되며, 2030년에는 3만2400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분당서울대병원 감염내과 문송미 교수는 “세 개 이상 항생제에 내성이 있는 ‘다제내성균’에 감염돼 패혈증으로 중환자실에 내려올 경우, 한 달 이내 사망할 확률이 50%에 달한다”며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와 닿지 않겠지만 의료현장에서는 항생제를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 매일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책 비웃는 사용량… OECD 2위 ‘항생제 공화국’
세계보건기구(WHO)는 지난 2015년 항생제 내성을 전 지구적 공중보건 위협으로 규정하고 각국에 대응 전략 수립을 권고했다. 우리나라 역시 이에 따라 항생제 내성 관리 대책을 수립해 단계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2016~2020년 1차 대책부터 시작해 현재 3차 대책(2026~2030년)을 진행 중이다.

그런데 10여년의 정책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항생제 사용량은 오히려 증가하는 추세다. 국내 항생제 처방량은 2020년 3억4767만건에서 2024년 5억5517만건으로 약 60% 늘었다. 이는 전 세계에서도 최상위권에 속한다. 지난 2023년 기준 인구 1000명당 하루 항생제 소비량을 뜻하는 DID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국 중 튀르키예 다음으로 2위를 기록했다. OECD 평균 18.3 DID를 크게 웃돌고 있다.

◇낮은 병원 문턱과 항생제 선호 인식이 내성 키워
우리나라의 높은 항생제 내성균 비율 원인으로, 전문가들은 의료 이용 구조를 꼽는다. 항생제 내성을 유발하는 가장 중요한 위험 요인은 ‘항생제에 얼마나 많이 노출되느냐’인데 우리나라는 병원 접근성이 높고 외래 진료 이용 횟수가 많아 그만큼 항생제를 많이 복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제 감기나 인후통처럼 대부분 바이러스 감염으로 발생하는 질환에서도 일부 환자들은 항생제를 처방받아야 치료를 제대로 받았다고 느끼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러한 인식은 의료 현장에서 항생제 처방 압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문 교수는 “병원은 당연히 약을 먹으러 가는 곳이고, 열이 나면 ‘마이신’를 먹어야 한다는 인식이 뿌리 깊다”며 “빨리 낫기를 원하는 환자나 보호자의 요구를 의료진이 외면하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진단 과정의 한계로 인해 항생제를 먼저 사용하는 ‘경험적 처방’도 항생제 사용을 늘리는 요인으로 꼽힌다. 세균 감염 여부를 정확히 확인하려면 배양검사 등 5~7일이 걸리는 추가 검사가 필요하지만 결과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환자 상태가 악화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 항생제를 먼저 사용하는 의료진이 많다.

◇‘적정 사용 관리’ 체계 도입됐지만 요양병원·의원급 사각지대
내성균이 증가해도 당장 눈에 띄는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내성균 감염 사례는 조금씩 퍼지고 있다. 실제 지난해 CRE 감염증 신고 건수는 4만5000건에 육박했다. 2018년, 연간 집계가 시작된 이후 최고치다.

이런 상황에서 주목받는 것이 ‘항생제 적정 사용 관리(ASP)’다. 의료기관에서 의사가 항생제를 처방할 때 감염내과 의료진 등 전문가가 적절성을 감시하고 조언해주는 시스템이다. 규모가 큰 종합병원들이 먼저 도입해 항생제 사용량을 낮추는 성과를 거두자 정부도 2024년 11월부터 ASP 시범사업을 시작했다. 제3차 국가 항생제 내성 관리대책 일환으로 2027년까지 301병상 이상 종합병원으로 확대한다는 입장이다.

다만 항생제 처방량이 많은 요양병원, 의원급 의료기관까지 관리망을 넓히기에는 갈 길이 멀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에 대해 문 교수는 “ASP 사업은 이제 시작인 단계라 첫 사업을 수행했던 90여개 병원이 빨리 체계를 만들어서 1·2차 의료기관으로 전파하는 게 중요하다”라며 “참여 병원들이 단기간에 항생제 관리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인프라를 구축한 건 고무적이지만 전문 인력 등이 부족하다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환자들의 인식 개선 역시 필요한 시점이다. 무심코 복용한 한 알이, 항생제 내성균을 유발 및 전파시켜 나중에 수술을 받거나 중증 질환에 걸렸을 때 치료를 어렵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상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