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수의 우울증 클리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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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클립아트코리아
사람은 자기 마음을 스스로 파악하기가 어렵다. 자신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타자가 필요 하다. 정서적으로 깊이 교감할 수 있는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서만 심리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다. 마음의 문제는 최첨단 의료 기술로도 해결하기가 어렵다. 지금도 여전히 환자와 치료자 사이의 인격적인 대화를 통해서만 회복의 길을 찾을 수 있다. 직장에서의 어려움, 양심의 가책과 죄책감, 분노와 스트레스, 실패와 낙담, 우울과 불안 등 마음 을 괴롭히는 문제라면 그 어떤 것이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치료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정신건강의학과에는 명의가 따로 없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그래도 굳이 꼽자면 “자신의 이야 기에 귀 기울이고 가능한 한 최대의 관심을 쏟아주는 의사”라면 누구나 명의일 것이다. 환자를 얼마나 많이 봤는지 자랑하는 의사가 반드시 좋은 의사는 아니다. 오히려 환자 수가 많 을수록 한 사람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들고, 상담의 깊이는 얕아질 수 밖에 없다. 아무리 탁월한 정신과 의사라도 하루에 볼 수 있는 환자 수에는 한계가 있다. 오히려 “환자를 많이 봤다”는 의사일수록 한 명 한 명에게 쏟은 시간은 짧아지므로 양질의 상담은 못했을 수도 있다. 정신과 의사의 유능함은 환자 숫자로 증명되지 않는다.

환자는 자신에게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다줄 무언가를 기대하지만, 누구에게나 잘 작동하는 그런 치료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정신과 수련을 받을 때 지도교수님은 “정신치료는 심혼을 다루 는 일이며, 단기간에 끝나는 코칭이나 카운슬링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셨다. 꿈을 분석하고, 과거의 기억과 연상을 풀어내며, 그림자와 콤플렉스를 의식화하해 자기실현을 향해가 는 정신치료는 수개월에서 수년에 걸친 지난한 작업이다. 카를 융의 저서에 기술된 바에 따르면, 그는 환자를 일주일에 최대 세 번에서 네 번 정도 만나야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고 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두 번의 상담 회기를 가져야 한다고도 적혀 있다. 하지만 요즘 임상 현장에서는 전통적인 정신분석을 받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보다, 삶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단기간 상담을 받으려는 경우가 더 많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우울이나,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인생의 변곡점을 슬기롭게 통과하기 위한 조력자를 찾는 사례도 늘고 있다.

정신과 치료법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의사마다 접근 방식도 다르다. 어떤 의사는 오랜 시간 상담하며 근원적인 통찰을 이끌어내려 하고, 어떤 의사는 짧은 안에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 효과를 끌어낼 수 있는 실용적 접근을 선호한다. 그러나 아무리 유능한 의사라도 환자의 성향이나 선호와 맞지 않으면 치료 효과를 내기 어렵다. 환자와 의사가 맺는 치료적 동맹은 치료 기법 그 자체 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환자가 치유적으 로 변화하고 회복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은 특정한 기법이 아니라 신뢰와 공감으로 형성된 관계 다. 서로 잘 소통하고, 신뢰가 생기며, 환자 내면에서 변화의 동기가 자나날 때 그 관계 자체가 치료가 된다.


물론 이 의사 저 의사 쇼핑하듯 옮겨 다니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러나 필요하다면 한두 곳 정도 더 방문해 자신과 잘 맞는 의사를 찾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몇 군데 병원을 다니는 걸 이상하 게 여길 필요는 없다. 상담 시간에 불편감을 느낀다면 새로운 치료자를 고려해 보는 것도 괜찮다. 나와 잘 맞는 의사를 찾는 데 시간과 노력이 들 수 있다. 정신건강의학과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정신과 상담에 대해 지나친 믿음이나 환상을 갖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마음의 문제가 명확하지 않거나, 환자가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 혼란스러워할 때는 심리를 탐색하고 해결책을 찾아 가는 데 시간이 걸린다. 한 번의 상담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의사도 한 번의 만남으로 환자의 모든 면을 이해할 수 없다. 치료 계획이나 방향에 불만이 있다면 그것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좋다. 속으로 감추면 치료 관계를 맺기 어렵다. 정신과 의사는 독심술사가 아니다. 환자가 스스로의 이야기를 하지 않거나 회피하면, 상담은 깊어질 수 없다. 피상적인 대화만 오가거나 상호작용이 단절되면 치료는 의미를 잃는다.

의사는 환자의 언어는 물론 비언어적 표현까지 세심히 관찰하지만, 말로 표현되지 않은 환자의 속마음 까지 완벽히 읽어낼 수는 없다. 정신과 상담이 처음이라 어색하더라도 가능한 한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표현해주면 좋다. 병원에 오게 된 이유와 목적, 내원 전의 스트레스, 그리고 어떤 증상이 있었는지를 말로 설명해주면 효과적으로 진단과 치료 계획을 세울 수 있다. 마음속에서 어떤 생각과 느낌이 드는지를 이야기해 주면 더 좋다. 막연하게 “힘들다, 행복해지고 싶다”라고 말하기 보다 “불면을 해결하고 싶다, 의욕이 생겼으면 좋겠다”처럼 도움을 받고 싶은 지점을 의사와 구체적으로 공유할 수 있다면 진료 시간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