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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서울 상암 월드컵공원에서 '2025 오티즘 레이스'가 개최됐다. 오티즘 레이스는 자폐스펙트럼장애를 포함해 발달장애인의 사회적 인식을 높이기 위해 한국자폐인사랑협회에서 주최하는 캠페인 성격의 마라톤 대회다. /사진=이슬비 기자
"가족 다 같이 축제처럼 즐기기 좋은 마라톤이에요." "다양한 사람이 모두 함께 뛰니까 더 즐거워요."

지난 1일 서울 상암 월드컵공원에서 '2025 오티즘 레이스'가 성공적으로 개최됐다. 비 예보가 무색하게 하늘은 쾌청했고, 가을을 맞이한 공원은 울긋불긋하게 물든 단풍을 뽐냈다. '다름을 다채로움으로!'라는 슬로건 아래 진행되는 '다채'로운 레이스, 오티즘 레이스가 개최되기 딱 좋은 날씨였다.

오티즘(자폐스펙트럼장애) 레이스는 오티즘 당사자와 비장애인이 함께 달리는 마라톤이다. 오티즘은 공감 기능이 떨어지고 의사소통이 어려우며 반복적인 행동을 보이는 발달 장애의 일종이다. 의사소통이 어렵다 보니, 일상생활에서 다른 사람과 어울릴 수 있는 시간이 매우 적다. 그만큼 운동 시설을 이용하기도 어려워 심혈관계 질환과 만성질환 위험이 큰 편이다. 한국자폐인사랑협회는 당사자들의 활동성을 높이고, 오티즘에 대한 인식도 개선하기 위해 '오티즘 레이스'를 2020년부터 개최하고 있다.

직접 참가해 보니 레이스보단 축제에 가까웠다. 경쟁보다 함께 어우러지는 곳이었다.


◇"같이 뛰어서 좋아요"… 레이스 나가기 전 연습부터 '함께'
10월 21일 오후 7시반, 레이스가 개최되기 열흘 전 여의도 공원을 찾았다. 오티즘 레이스를 위해 연습하는 러닝 클럽 멤버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오티즘 레이스 러닝 클럽은 레이스 6주 전부터 발달장애인과 비장애인인 건강 파트너가 한 팀으로 여섯 차례 만나 함께 달리기를 연습하는 일종의 동호회다. 전문 코치 지도 아래에서 4.2km 완주를 목표로, 단계별로 함께 달린다.

가기 전, 기자부터 선입견에 휩싸여 있었다. '자폐스펙트럼'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증상이 매우 다양한 질환이다 보니 모두 즐겁게 연습하는 건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다. 도착하자마자 만난 오티즘 당사자 김상욱(24)씨를 보고 생각이 180도 바뀌었다. 오히려 어떤 러닝 클럽보다도 '함께' 즐거울 수 있는 포용력 넓고, 친절한 연습장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부터 달리기를 시작한 김상욱 씨는 꽤 능숙한 러너다. 2019년 처음 나간 대회에서 청년 일반부 1등을 차지하기도 했을 정도. 그러나 지난해 갑자기 뇌전증(이유 없는 발작을 특징으로 하는 신경질환)이 생기면서 잠시 운동을 쉬어야 했다. 이런 그가 주변 만류에도 오티즘 레이스와 러닝 클럽 연습에는 꼭 함께하고 싶어 했다. 김상욱 씨는 "같이 뛰는 게 좋다"며 "달리는 게 힘들어도, 옆에 짝꿍이 있으면 안 힘들다"고 했다. 오티즘 당사자 중엔 김상욱 씨처럼 의사소통이 가능한 고기능인 사람도 있지만, 대화 자체가 어려운 중증 오티즘 당사자도 있다.

서지훈(17)씨는 어렵지만 분명하게 "달리는 거 좋아해"라고 말했다. 서지훈 씨 어머니는 "아이가 운동장 달리는 걸 좋아하는데, 같이 달리긴 어려워서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참여하게 됐다"며 "사람이 많아서 참여할 수 있을까 걱정하며 왔는데, 오히려 재밌어하더라"고 말했다. 중증 오티즘 당사자는 낯선 사람이나 복잡한 환경에서 불안감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

비장애인 건강 파트너에게도 러닝 클럽은 의미 있는 공간이었다. 한국장애인개발원에서 홍보팀 소속으로 있는 이혜림(38)씨는 지난해에 이어 두 해째 러닝 클럽에 참가했다. 이혜림 씨는 "공공행정기관이다보니 현장에서 당사자를 만날 기회가 드물어 참여하게 됐고, 확실히 만나면서 당사자 입장을 이해하는 건 정말 달랐다"며 "무엇보다 도와준다는 느낌보다 같은 곳을 보고 옆에서 나란히 뛰면 협동하는 느낌이라, 같은 팀으로서 더 어떻게 함께할 수 있을지 당사자 입장을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이어 "모든 사람에게 추천하지만, 장애인 관련 기관 종사자라면 참여하길 강력히 추천한다"고 했다. 교육청에서 특수교육지원센터에 있는 유혜민(32)씨도 "발달장애인이 운동이나 취미를 갖는 게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러닝 클럽이라는 좋은 기회를 소셜미디어로 알게 돼 참여했다"며 "같이 달리면서 대화하며 서로를 이해해 가는 과정이 좋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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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티즘 레이스 러닝 클럽​은 오티즘 레이스 전 연습을 위해 10월 21일 여의도에서 함께 달렸다./사진=이슬비 기자
◇소외 없는 분위기 속 낯가림 사라져
모두 함께하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으니, 기자도 뛰고 싶었다. 청바지에 니트를 입고 있었지만, 함께 연습에 참여해 4.2km를 뛰었다. 선두에 선 김상욱 씨는 팀장을 자처하며, 뛰기 전 정한 구호를 쉼 없이 외쳤다. "청춘!"이라고 선창하면, 선두 그룹에 있는 건강 파트너와 당사자 모두 "화이팅!"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른 여명의 사람이 함께, 동시에 각기 다른 자신만의 속도로 달렸다. 완주 후에는 모든 사람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고, 완주를 마친 사람에게는 박수로 응원했다. 누구 하나 소외되는 사람이 없는 분위기라, 낯가림이 심한 중증 당사자도 거리낌 없이 어울릴 수 있었다. 서지훈 씨 보호자는 "러닝 클럽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지훈이는 낯선 곳에 대한 거부가 매우 심했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을 불편해했다"며 "지금은 기자 앞에서도 도망가지 않고, 울지 않고 있을 수 있다"고 했다. 서지훈 씨는 불편해 보였지만, 자리를 피하지 않고 인터뷰가 끝날 때까지 대화를 이어가려고 애썼다. 서지훈 씨 보호자는 "여기서 또래 장애인 친구들을 많이 만나서 반가워하는 모습도 보이고, 달리면서 즐거워한다"며 "지난해에는 4.2km를 완주하기도 했다"고 했다.


발달장애인 아동은 인지적인 특성이나 감각 예민함으로 운동량이 부족하기 쉽고, 그만큼 달릴 수 있는 거리를 늘리기도 어렵다. 이혜림 씨는 "지난해 파트너였던 하은이는 처음엔 구부정하게 고개를 숙이고 달리고, 4.2km 완주하는 건 어불성설이었다"며 "같이 연습하다 보니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멀리 보면서 달리게 됐고, 결국 오티즘 레이스 당일에는 완주해 냈는데 함께 도착 지점에 다다른 순간은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이어 "빨리 달리는 것보다도 함께 해낸다는 데 의미가 크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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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티즘 레이스에서는 빠르게 달리는 사람부터 천천히 걷는 사람까지 다채로운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사진=이슬비 기자
◇달리며 편견 뛰어넘어… 오티즘 레이스의 현장
오티즘 레이스는 지금까지 나가본 그 어떤 마라톤과도 달랐다. 빠르게 뛰어가는 사람부터, 손을 잡고 한 발짝씩 걸어가는 사람까지 말 그대로 다채로웠다. 모든 사람이 함께 즐길 수 있도록 주최 측도 축제처럼 행사를 준비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에선 단체로 오티즘 레이스에 참여했다. 해당 기관 소속 연구원인 리자 고티나(벨라루스)는 "서울에서 개최된 다른 마라톤도 갔었는데, 이곳과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며 "오티즘 레이스는 가족과 아이가 많아 마치 함께 즐기는 축제에 온 것 같다"고 했다. 이어 "발달장애 당사자와 함께 즐기는 곳이라 더 새롭고 좋다"고 했다. 아내와 함께 오티즘 레이스를 찾은 A씨는 "마라톤 대회를 검색하다가 알게 돼서 참여하게 됐다"며 "발달장애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고, 일상에서도 접할 일이 없었는데 이번 기회로 이해도가 조금은 더 높아졌다"고 했다.

월드컵 공원에는 오티즘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다양한 부스도 운영됐다. 가장 줄이 길었던 부스에서는 주사위를 던져, 나온 숫자에 해당하는 미션을 성공하면 발달장애인이 만든 인형을 줬다. 기자도 주사위를 던졌다. 숫자 2가 나와, 발달장애 인식 OX 퀴즈를 맞혀야 했다. 이 외에도 옆 사람 응원하기, 오티즘 레이스 기념사진 찍기 등 자연스럽게 인식을 개선할 수 있는 활동이 준비돼 있었다. 오티즘레이스 후원사인 하나금융그룹에서도 단체로 참여했는데, 지난해에 이어서 또 참여한 한 하나금융그룹 임직원은 "전에는 어쩌다 발달장애인을 만나면 어떻게 대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며 "이제는 자연스럽지 않게 다가갈 수 있게 됐다"고 했다.


레이스 이후에는 완주를 서로 축하하기 위한, 콘서트와 경품 추천 행사가 이어졌다. 발달장애 전문 연주단체 '드림위드앙상블'과 크로스오버 보컬그룹 '라오니엘'이 협동 무대를 꾸몄다. 참가자 모두 일어서 춤을 추고, 노래를 따라 부르며 콘서트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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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닝클럽에서 만난 김상욱씨를 오티즘 레이스 당일 다시 만났다. 김상욱씨는 "22분대로 완주했다"며 기록을 보여줬다./사진=이슬비 기자
한국자폐인사랑협회 관계자는 "6회째 대회를 운영해 오면서 오티즘에 대한 인식이 많이 개선됐다고 생각한다"며 "오티즘 가족뿐 아니라, 앞으로 일반 참가자 모두 더 함께 즐길 수 있는 시민 참여형 축제로 발전시켜 나갈 예정"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