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이 예술을 만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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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은 교수 그림
병원에서 치료받는 환자와 보호자들은 대체로 마음이 조급합니다. 빠른 진단, 빠른 치료, 그리고 빠른 완치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감정의 파도 한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마치 눈앞의 파도 속에서 허우적대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 순간에는 무엇이 파도이고 어디가 하늘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너무 가까이 들여다보면, 오히려 모든 것이 더 흐릿해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몇 시간, 치료를 앞둔 며칠은 실제 시간보다 훨씬 길게 느껴집니다. 병실의 조명이 유난히 밝게 느껴지고, 누워 있는 자기 몸이 낯설게 보이며, 소독약 냄새나 작은 소리에도 예민해집니다.

이처럼 외부 상황으로 인해 불편한 감정이 우리와 너무 밀착되면, 그 감정은 단순히 ‘내가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나를 집어삼키는 감정’으로 변합니다. 충격, 공포, 두려움, 불안, 절망처럼 일상에서 쉽게 접하지 못한 감정들이 한꺼번에 밀려올 때, 우리는 그 감정에 압도되고 몸이 조여 오는 듯한 답답함을 느끼게 됩니다.

마치 그림을 너무 가까이에서 보아 전체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것처럼, 감정에 휩싸여 있으면 삶의 큰 맥락 속에서 지금의 고통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도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미술치료사로서, 환자분들께 ‘감정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는 연습’을 종종 제안합니다. 오늘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그 과정을 잠시 경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림을 그릴 때, 손과 종이 사이에는 자연스러운 거리가 생깁니다. 그 거리 안에서 감정은 ‘나와 분리된 이미지’로 옮겨집니다. 그렇게 옮겨진 감정을 그림 속에서 바라보면, 우리는 더 이상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오히려 그 감정을 이해하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이 ‘거리’는 감정을 회피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안전하게 다룰 수 있게 해주는 치료적 공간이 됩니다. 이때 생기는 ‘제3의 시선’은 자기 삶 전체를 조망하는 통찰을 가능하게 합니다.

“미술은 외상적인 이미지와 관련된 강렬한 정서로부터 거리를 유지하게 도와주는 매개체이다.”


미술치료학자 하워드(Howard, 1990)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감정이 너무 가까이 있을 때, 우리는 그 감정 속에 빠져버리지만, 그림은 그 감정을 ‘바깥으로 옮겨놓을’ 수 있게 해준다. 그렇게 화면 위에 옮겨진 감정은 더 이상 우리를 삼키는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가 조용히 바라볼 수 있는 하나의 이미지가 된다. 하워드는 이 ‘거리두기’가 바로 치유의 핵심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크게만 보이던 것이 작게 보이기도 하고, 압도되어 보지 못했던 것이 다른 형태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한 환자분은 늘 두려움과 우울 속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의 덩어리를 그림으로 그리고, 완성된 그림을 멀리서 바라보았습니다. 바닥에 두고 위에서 내려다보기도 하고, 벽에 붙여 멀리 떨어져 바라보기도 했지요. 그러자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 이제야 보여요. 생각보다 크거나 무서운 게 아니네요. 저게 무섭다고 내가 얼마나 애썼는지도 보이네요.”

이처럼 그림을 통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환자에게 저는 다시 한 번 ‘거리두기’를 제안했습니다. 이번에는 시간적 거리두기였습니다. 지금의 힘든 순간만이 아니라, 진단받았던 때부터 지금까지의 여정을 함께 되짚어보는 것이지요. 그렇게 자신의 치료 과정을 돌아보면, 고통 속에서도 변화와 성장이 있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림을 통해 거리를 두고 자신을 바라보는 일은, 고통의 한 장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새롭게 이해하는 과정입니다. 그것은 자기비판이 아닌 자기 이해의 출발점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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