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6일 한국자폐학회 추계학술대회 개최
세계 석학들이 답하는 자폐의 현재와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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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게티이미지뱅크
“자폐스펙트럼장애(ASD)는 ‘질병’이 아닌 일생을 함께하는 ‘삶의 조건’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자폐는 약 90% 이상 유전적 요인의 영향을 받고, 자폐인의 70%가 성인이 돼서도 진단을 유지하므로, 장기적 관점에서 연구와 지원이 필요합니다.”

한국자폐학회 유희정 회장(분당서울대병원 소아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은 지난 6일 분당서울대병원 헬스케어혁신파크에서 열린 한국자폐학회 추계학술대회 기조강연에서 이같이 말했다. 이번 학술대회 주제는 ‘자폐의 현재와 미래, 세계의 석학들이 답하다’로, 자폐의 전 생애를 아우르는 최신 과학적 연구와 치료·지원 전략을 논의했다. 해외 석학과 국내 의료진, 자폐 아동 부모, 대학원생·연구자, 임상가, 교육자 등이 참석해 한국 사회가 자폐를 더 깊이 이해하고 실질적 지원 체계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했다.

◇“자폐는 끝이 아닌 출발점, 각자 장점 살려야”
1990년대까지만 해도 미디어 속 자폐인은 ‘특별하거나 불행한 존재’로 묘사됐다. 하지만 최근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나 다큐멘터리 시리즈 ‘러브 온 더 스펙트럼' 등에서는 우리 사회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구성원으로 그려지고 있다. 유희정 회장은 “이는 자폐를 사라지는 질병이 아닌 삶의 조건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흐름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특히 전문가들은 자폐스펙트럼장애의 다양성과 평생에 걸친 변화의 가능성을 강조했다. UCLA 의대 정신건강의학과 캐서린 로드 교수는 “자폐는 원인도, 발달 경로도 매우 다양하다”며 “어떤 아동은 매우 영리하고 독립적 생활이 가능하지만, 다른 경우에는 언어·인지 발달이 지연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중요한 것은 누구도 9~19세 구간에서 평평한 성장 곡선을 그리진 않는다는 점”이라며 “더디더라도 개입을 지속하면 언어·사회성 발달에서 개선을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로드 교수는 실제 임상 사례를 통해 5살 자폐 아동이 서른 살이 되었을 때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줬다. 그는 “자폐인은 각기 다른 특성과 강점을 지니고 있다”며 “이를 조기에 파악해 맞춤형 개입과 프로그램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자폐 성인의 삶이 결코 부정적이지 않다고 설명했다. 로드 교수는 “많은 성인(약 35%)이 여전히 부모와 함께 살지만, 일상생활 능력을 키우고 직업을 갖는 등 사회 속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며 “자폐라는 진단은 끝이 아니라 출발점이며, 개별적 특성과 강점을 이해하고, 발달 단계마다 목표를 설정해 지원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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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분당서울대병원 헬스케어혁신파크에서 열린 한국자폐학회 추계학술대회에서 한국자폐학회 유희정 회장이 강연을 하고 있다.
◇자폐는 유전적 뿌리… 개인 맞춤형 접근 필요
자폐의 유전학에 대한 발표도 주목을 받았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자폐의 원인은 유전과 환경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유전적 기반 위에 있다. 캐나다 토론토대 분자의학·분자유전학과 스티븐 쉬어러 교수는 “자폐스펙트럼장애의 50% 이상은 복잡한 유전자 이상과 연관돼 있으며, 지금까지 1000개 이상의 희귀 변이가 확인됐다”고 말했다. 카이스트 생명과학과 김은준 교수 역시 “자폐 관련 유전자 변이가 많이 밝혀졌지만, 아직 뚜렷하게 합의된 기전이나 치료제는 없다”며 “연구 과정에서 같은 유전자라도 변이 종류, 마우스 연령·성별·유전적 배경에 따라 전혀 다른 표현형이 나타날 수 있다”고 했다. 이는 자폐가 단일 질환이 아닌 다양한 기전이 얽힌 복합적 뇌질환임을 보여준다. 또한 초기 발달 시기의 시냅스 이상이 이후 장기적인 뇌 발달과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치므로, 조기 개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자폐는 뇌전증(51%), 불안장애(45%), 우울(28%), 수면장애(15%), ADHD(14%) 등 다양한 신체·정신적 동반질환과 함께 나타난다. 개별 환자의 특성에 맞춘 조기 개입이 증상 개선에 가장 효과적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자폐 연구의 최신 성과도 소개됐다. 현재 자폐 관련 135개 유전자가 규명됐으며, 남녀 비율은 약 4대1로 나타난다. 쉬어러 교수는 “유전자 변이 대부분은 부모로부터 물려받기보다 임신 시 새로 발생하는데, 특히 아버지 나이가 증가할수록 자폐 위험이 높아진다”며 “이는 정자에서 생기는 변이가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편, 형제자매 중 30~40%가 발달 문제를 공유하는 것도 중요한 단서이며, 자폐 유전적 요인을 함께 가지고 있는 일란성 쌍둥이라도 표현 양상은 다를 수 있다는 점도 강조됐다.

◇‘자폐 치료제’ 대신 ‘사회성 조정 약물’로
자폐 치료 약물의 미래에 대한 논의도 이어졌다. 건국대 의학전문대학원 약리학교실 신찬영 교수는 “한국은 세계적 수준의 신약 개발 역량을 갖췄지만, 중추신경계에 작용하는 약물은 아직 사실상 전무하다”며 “자폐스펙트럼장애 치료제 개발 역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자폐 치료제 연구가 어려운 이유로 ▲자폐는 증상과 원인이 매우 다양해 임상시험에서 효과를 뚜렷하게 증명하기 어려움 ▲뇌 장벽이라는 구조적 한계 때문에 약물이 표적 부위에 도달하기 어려움 ▲뇌질환 약물 임상시험에서 흔히 나타나는 강한 위약효과(플라세보 효과)로 실제 효능 검증이 지체된다는 점 등을 꼽았다.


그는 기존의 ‘자폐 치료제’ 개념 대신 “사회적 상호작용을 개선하는 ‘사회성 조절 약물’ 개발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자폐 아동뿐 아니라 우울증, 불안 장애 등 사회적 기능 저하가 두드러지는 다양한 환자군에도 적용할 수 있어 임상적 가치가 크다고 설명했다. 또한, 신 교수는 줄기세포 치료나 마이크로바이옴 치료 등 새로운 방식에 대한 과도한 기대를 경계했다. 신찬영 교수는 “아직까지 과학적 근거가 충분하지 않은 접근에 투자와 관심이 몰리면, 실제 환자에게 효과를 줄 수 있는 연구가 소외될 수 있다”며 “대신, 유전자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한 맞춤형 치료제 개발과 환자 특성별 맞춤 임상 설계 등 근거 기반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국 자폐의 미래, 다층적·다학제적 접근 필요
그렇다면 앞으로 한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일까. 고려대 심리학부 김소현 교수는 해외 석학들의 논의를 종합해, 자폐가 신경다양성부터 중증 발달 지연까지 폭넓게 나타나는 만큼, 생애 주기 전반을 아우르는 통합 지원 모델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기존 유아기 중심 중재를 넘어 학령기, 청소년기, 성인기까지 단계별 맞춤형 서비스와 기능·삶의 질까지 고려한 다층적 접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고기능·저기능이라는 이분법을 벗어나 다양한 기능 수준에 맞춘 지원 체계, 지역사회에서 실질적으로 작동하는 프로그램, 가족과 주변인의 역할 분담 등이 함께 마련돼야 한다”며 “유전체 연구와 임상·기초 연구를 연계한 대규모 통합 연구, 하나의 센터에서 다양한 치료를 제공할 수 있는 허브 구축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끝으로 김 교수는 “자폐 연구와 치료는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며 “연구자, 임상가, 교육자, 가족, 지역사회가 함께 참여하는 다학제적 협력이야말로 한국이 준비해야 할 미래”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