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수의 우울증 클리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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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클립아트코리아
“요즘은 인공지능 앱한테 고민을 털어놓아요.”

진료실에서 이런 말을 하는 환자가 하나둘 늘고 있다. 기분이 울적한데 마음을 나눌 사람이 곁에 없을 때, 스마트폰을 열어 챗봇에게 이야기를 건넨다는 것이다. AI가 공감을 잘 해준다며, 꽤 위로를 얻는다고 했다.

어느 날 한 환자가 자신의 스마트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지난 한 달 동안의 기분 상태가 시간 흐름에 따라 그래프로 정리돼 있었고, 특정 상황에서 느꼈던 감정과 스트레스도 함께 기록돼 있었다. 나는 우울증 환자들에게 기분일지를 써보라고 자주 권한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며칠 쓰다가 그만두거나, 아예 아무것도 적어오지 않는다. 그런데 이 환자는 AI를 활용해 자신의 감정 상태를 꾸준히 기록하고 모니터링해왔던 것이다.

우울이나 불안 같은 정서 문제는 일정한 패턴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유사한 상황이나 특정 대상과 마주할 때에 감정이 반복적으로 동요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치료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과 행동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왜 그렇게 느끼고 반응했는지 설명하지 못할 때가 많다. 이럴 때 AI는 느낌의 흔적을 기록해주는 도구가 될 수 있다. 


AI는 정서를 언어화하고, 반복되는 습관을 추적하며, 평소에는 지나치기 쉬운 감정의 패턴을 포착하는 데 유용한 도구다. 어떤 상황에서 유독 예민해지는지, 어떤 행동을 한 후에 기분이 좋아지는지 확인할 수 있게 도와준다. 미처 깨닫지 못했던 우울의 주기나 불안을 유발하는 요인을 발견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우울하거나 불안할 때, 혹은 짜증과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AI 챗봇에게 현재 상황과 느낌을 짧게 남겨 둔다. 기쁨과 성취감을 느꼈을 때도 마찬가지다. 누구를 만나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일을 하고 나서 기분이 어땠는지 간단히 적어두면 나중에 그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주 혹은 한 달간의 정서 변화를 파악할 수 있다. 진료 받기 전 AI에게 “지난 한 달 동안 내 기분이 어땠는지”물어볼 수도 있다. 이렇게 얻어진 자료는 감정의 흐름을 되짚고, 증상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활용할 수 있다.

나는 그 환자와 함께 한 달간의 기록을 천천히 되짚어보았다. 주로 회의가 있던 날마다 불안이 심해졌고, 아침 출근길에 긴장도가 특히 높아지는 경향이 나타났다. 술을 마신 다음 날 아침에는 어김없이 불쾌감이 생겼다. 치료실을 찾기 전이나 치료 이후의 공백 기간 동안 기분이 어떻게 변했는지도 파악할 수 있었다. 이 과정은 단순히 증상을 살피는 데 그치지 않고, 환자가 자기 감정을 이해하고, 정서 조절에 대한 효능감을 회복하는 밑거름이 된다.   

물론 주의할 점도 있다. AI는 아직 비언어적 단서나 대화의 맥락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불안하다”는 말이 면접을 앞둔 긴장인지, 극단적 공포인지, 상실의 슬픔인지를 정확히 구분하지 못한다. 사용자의 말을 오해할 수도 있다. 자살 위험과 폭력 징후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다. 마음건강 정보가 AI를 만든 회사에 어떻게 저장되고 활용되는지도 고민해봐야 할 문제다. AI가 마음건강 전문가를 대신할 수 없다. 감정의 복잡성과 그 의미를 이해하고, 진정성 있는 공감을 전달하는 일은 사람만이 할 수 있다. AI는 우리 내면을 비춰주는 도구가 될 수는 있어도, 그 거울에 비친 나를 어떻게 해석하고 변화시킬지는 결국 사람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