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조선의 운명이 건강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우리나라가 국권을 되찾고, 정부 수립을 한 지 8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 날을 맞이하기까지 수많은 위인이 헌신했다. 그중에서도 국가의 흥망이 '국민 건강'에 달려 있다고 보고, 공중보건을 향상해 독립 운동에 기여한 의사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김창세'다.
김창세는 세브란스의학교(현 연세대 의대) 졸업 후 중국 상하이 홍십자병원에서 근무했다. 그곳에서 임시활동 정부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위장이 좋지 않았던 도산 안창호의 주치의였고, 임시정부 산하 대한적십자회에서 대원 모집과 부상자 구호 활동 등을 전개했다. 독립전쟁에 참여할 의료인 양성을 위해 대한적십자회 부속 '간호원양성소'를 설립하고 교수로 활동했다.
이때부터 김창세는 고국의 독립과 의학, 건강의 상관성을 고민하게 된다. 국민 건강이 국가흥망과 직접 연관된다고 결론을 내린 그는, 치료 못지 않게 예방이 중요하다고 여겨 '공중위생'을 공부하러 미국으로 떠난다.
1923년 김창세는 공중보건학 분야에 권위 있는 존스홉킨스대 보건대학원에 입학해, 1925년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우리나라 최초 보건학 박사의 탄생이다. 그는 한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단백질원인 '녹두콩'을 연구해 위생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학 중에도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국내외 독립운동을 하는 조선인 시찰 내용을 담은 일제 외무성 문서 등에 1920년대 김창세의 이름이 수차례 언급된다. 1921년 김창세는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하딩에게 우리나라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만날 계획을 서신에 써 고모부에게 보냈는데, 이 편지가 일본 경찰에 압수된 바 있다. 이후 김창세의 활동을 일제가 주의깊게 살펴본 것으로 추정된다.
김창세는 박사학위 취득 후 조국으로 돌아와 모교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세균·위생학 조교수로 부임한다. 이후 적극적으로 질병 예방과 건강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한다. 열악한 위생 수준을 향상하고, 공중보건 의식을 증진해야 한다는 게 골자다. 민족이 부흥하기 위해 민족 육체를 건강하게 개조해야 한다는 '육체적 민족개조론'을 주장한다.
김창세는 몽고족, 만주족, 로마인들 등 역사상 위대한 민족 모두 체력이 건장한 점에 주목했다.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등 당시 강대국인 곳도 다른 민족보다 건강했다. 그가 보기에 우리나라가 쇠퇴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건강 부족'이었다. 그는 정치적 해방, 교육의 보급, 경제 발전, 종교 보급 등 모든 부흥법이 건강 없이는 성취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먼저 '위생'을 강조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건강상태를 진보시킬 그 제일보는 공중위생교육에 있다"고 했다.
더 적극적인 공중위생 활동을 펼치기 위해 1927년 11월 교수직을 사임하고, 중국, 미국, 프랑스 등을 넘나들며 건강 교육을 활발하게 펼쳤다. 결핵 퇴치에도 힘썼다.
1930년 김창세는 결핵 관련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대공황 초입에 미국에 들어갔다. 1931년 만주사변으로 항저우에 세웠던 결핵요양원이 몰수당했고, 이로 인해 그는 우울증에 빠진다. 점점 일본 군부가 중국을 공격하며 정세가 어지러워졌고, 주 소득원이었던 강연·모금 활동 등도 취소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거사로 도산 안창호가 체포됐다. 김창세는 즉시 도산의 석방을 위해 미국 국무부, 상·하원 의원들, 프랑스 대사 등의 인사를 만나며 국제적으로 활동을 전개 했다. 동시에 상해에 있던 가족을 미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애를 썼지만, 모든 게 잘 되지 않았다. 심한 우울증과 신체적 장애를 겪다, 1934년 3월 15일 뉴욕의 아파트에서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41세였다.
삼육대 이종근 명예교수의 '한국 최초의 공중보건학 박사 김창세: 세균학과 위생학의 선구자이자 독립운동가로서의 활동을 중심으로' 논문을 참고했다. 이종근 교수는 논문에서 "김창세는 지금으로부터 한 세기 전 민지를 일깨우고 공중보건 활동을 통한 독립을 자신의 사명으로 알고 도전한 인물이다"고 평했다.
한편, 김창세 외에도 순천향의대 예방의학교실 박윤형 교수가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약 150여 명의 의사 출신 독립운동가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중 잘 알려진 인물로는 독립신문을 발행한 서재필, 중국 간도에서 병원을 운영하며 독립 운동을 이어간 김필순 등이 있다.
우리나라가 국권을 되찾고, 정부 수립을 한 지 8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 날을 맞이하기까지 수많은 위인이 헌신했다. 그중에서도 국가의 흥망이 '국민 건강'에 달려 있다고 보고, 공중보건을 향상해 독립 운동에 기여한 의사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김창세'다.
김창세는 세브란스의학교(현 연세대 의대) 졸업 후 중국 상하이 홍십자병원에서 근무했다. 그곳에서 임시활동 정부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위장이 좋지 않았던 도산 안창호의 주치의였고, 임시정부 산하 대한적십자회에서 대원 모집과 부상자 구호 활동 등을 전개했다. 독립전쟁에 참여할 의료인 양성을 위해 대한적십자회 부속 '간호원양성소'를 설립하고 교수로 활동했다.
이때부터 김창세는 고국의 독립과 의학, 건강의 상관성을 고민하게 된다. 국민 건강이 국가흥망과 직접 연관된다고 결론을 내린 그는, 치료 못지 않게 예방이 중요하다고 여겨 '공중위생'을 공부하러 미국으로 떠난다.
1923년 김창세는 공중보건학 분야에 권위 있는 존스홉킨스대 보건대학원에 입학해, 1925년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우리나라 최초 보건학 박사의 탄생이다. 그는 한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단백질원인 '녹두콩'을 연구해 위생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학 중에도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국내외 독립운동을 하는 조선인 시찰 내용을 담은 일제 외무성 문서 등에 1920년대 김창세의 이름이 수차례 언급된다. 1921년 김창세는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하딩에게 우리나라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만날 계획을 서신에 써 고모부에게 보냈는데, 이 편지가 일본 경찰에 압수된 바 있다. 이후 김창세의 활동을 일제가 주의깊게 살펴본 것으로 추정된다.
김창세는 박사학위 취득 후 조국으로 돌아와 모교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세균·위생학 조교수로 부임한다. 이후 적극적으로 질병 예방과 건강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한다. 열악한 위생 수준을 향상하고, 공중보건 의식을 증진해야 한다는 게 골자다. 민족이 부흥하기 위해 민족 육체를 건강하게 개조해야 한다는 '육체적 민족개조론'을 주장한다.
김창세는 몽고족, 만주족, 로마인들 등 역사상 위대한 민족 모두 체력이 건장한 점에 주목했다.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등 당시 강대국인 곳도 다른 민족보다 건강했다. 그가 보기에 우리나라가 쇠퇴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건강 부족'이었다. 그는 정치적 해방, 교육의 보급, 경제 발전, 종교 보급 등 모든 부흥법이 건강 없이는 성취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먼저 '위생'을 강조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건강상태를 진보시킬 그 제일보는 공중위생교육에 있다"고 했다.
더 적극적인 공중위생 활동을 펼치기 위해 1927년 11월 교수직을 사임하고, 중국, 미국, 프랑스 등을 넘나들며 건강 교육을 활발하게 펼쳤다. 결핵 퇴치에도 힘썼다.
1930년 김창세는 결핵 관련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대공황 초입에 미국에 들어갔다. 1931년 만주사변으로 항저우에 세웠던 결핵요양원이 몰수당했고, 이로 인해 그는 우울증에 빠진다. 점점 일본 군부가 중국을 공격하며 정세가 어지러워졌고, 주 소득원이었던 강연·모금 활동 등도 취소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거사로 도산 안창호가 체포됐다. 김창세는 즉시 도산의 석방을 위해 미국 국무부, 상·하원 의원들, 프랑스 대사 등의 인사를 만나며 국제적으로 활동을 전개 했다. 동시에 상해에 있던 가족을 미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애를 썼지만, 모든 게 잘 되지 않았다. 심한 우울증과 신체적 장애를 겪다, 1934년 3월 15일 뉴욕의 아파트에서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41세였다.
삼육대 이종근 명예교수의 '한국 최초의 공중보건학 박사 김창세: 세균학과 위생학의 선구자이자 독립운동가로서의 활동을 중심으로' 논문을 참고했다. 이종근 교수는 논문에서 "김창세는 지금으로부터 한 세기 전 민지를 일깨우고 공중보건 활동을 통한 독립을 자신의 사명으로 알고 도전한 인물이다"고 평했다.
한편, 김창세 외에도 순천향의대 예방의학교실 박윤형 교수가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약 150여 명의 의사 출신 독립운동가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중 잘 알려진 인물로는 독립신문을 발행한 서재필, 중국 간도에서 병원을 운영하며 독립 운동을 이어간 김필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