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
초록색 안티푸라민 뚜껑 속 간호사는 누굴까? [우리 약史]
전종보 기자
입력 2025/06/13 19:07
[우리 약史] 안티푸라민
우리는 일반의약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유명한 약이라면 효능·적응증 정도는 이미 익히 들어 알고 있을 겁니다. 설사 모르더라도 약에 동봉된 사용설명서를 읽으면 됩니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서, 효능·적응증 이외의 정보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이를테면 약 이름에 담긴 뜻이나, 약의 개발 비화, 약을 만든 인물 또는 회사에 대한 이야기 등등 말입니다. [우리 약史]가 이처럼 설명서에는 나와 있지 않은 이야기들을 들려드립니다. 약의 역사(史)뿐 아니라, 약을 개발한 회사(社)나 약과 관련된 다소 사(私)적인 이야기도 다룹니다.
비록 원하는 답은 아니었겠으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하지 않았으면 한다. 안티푸라민과 관련해서는 뚜껑 속 간호사 그림 말고도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들이 제법 많다. 이를테면 90여년 전 안티푸라민 개발 비화부터 제품명 ‘안티푸라민’에 담긴 뜻 등이다. 물론, 뚜껑 속 간호사로 추정되는 인물들에 대해서도 소개할 참이다.
◇1933년 소아과 의사 호미리 여사 제안으로 개발
안티푸라민은 1933년 출시된 유한양행의 ‘자체 개발 1호’ 의약품이다. 유일한 박사가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유한양행을 세운 게 1926년이니, 회사 설립 7년 만에 내놓은 첫 제품인 셈이다.
안티푸라민의 개발에는 유일한 박사의 부인 호미리 여사의 숨은 조력이 있었다. 호 여사는 미국에서 동양인 여성 최초로 의사면허를 취득한 인물이다. 당시 그는 유 박사와 함께 한국에 들어와 유한양행 건물 2층에서 소아과를 운영했다.
매일 병원에서 아이들을 돌보던 호미리 여사는 예기치 못한 문제를 마주했다. 아이들이 넘어지거나 부딪혀 병원을 찾아와도, 발라줄 연고가 없었던 것이다. 실제 1920~1930년대는 우리나라 제약산업이 근대화되지 않았던 시기로, 가벼운 부상조차 치료가 어려워 많은 사람들이 의약품이 아닌 민간요법에 의지했다.
호미리 여사는 유한양행에 의약품 개발을 건의했고, 회사는 사람들이 일상에서 편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제품 개발에 나섰다. 그렇게 안티푸라민이 탄생했다.
안티푸라민 연고의 주성분은 멘톨, 캄파, 살리실산메칠 등으로, 소염 진통, 혈관 확장, 가려움증 개선 등에 도움이 된다. 보습 효과가 있는 바세린 성분도 다량 함유됐다.
알고 보면 ‘안티푸라민’이라는 제품명은 꽤나 정직한 이름이다. 반대를 뜻하는 ‘안티(anti)’에 ‘불태우다, 염증을 일으키다’라는 뜻의 ‘인플레임(inflame)’을 합쳐 발음하기 좋게 바꾼 것으로, ‘항염증제’, ‘진통소염제’라는 제품의 특성을 그대로 반영했다.
제품명과 관련해서도 한 가지 일화가 얽혀 있는데, 유일한 박사는 안티푸라민이 만병통치약처럼 여겨지는 것을 우려해 이처럼 명확하고 정직하게 제품명을 붙였다고 한다. 1930년대 안티푸라민 신문 광고에 ‘사용 전 의사와 상의하라’ 등의 문구를 넣은 것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림 속 간호사는 누구? 의견 분분
1961년 유한양행은 변화를 시도한다. 안티푸라민의 제품 케이스를 바꿔, 녹색 철제 캔에 간호사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결과적으로 이 선택은 대성공이었다. 안티푸라민은 빠르게 인지도를 높였고, ‘국민 연고’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후 2001년에 제품 디자인을 변경했음에도, 중장년층에게는 여전히 녹색 캔에 담긴 안티푸라민의 이미지가 깊숙이 박혀있다.
뚜껑 속 간호사의 정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후보는 크게 두 명으로 압축된다. 한 명은 제품 개발의 숨은 조력자인 호미리 여사고, 또 한 명은 유일한 박사의 동생이자 당시 간호사로 일했던 유순한 여사다. 간호사 그림인 만큼 유순한 여사일 것이라는 의견에 힘이 실리기도 한다. 유 여사는 국내 간호 분야 선구자로, 한국 최초로 국제적십자사로부터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기장을 받은 인물이다.
높은 인지도를 쌓아가던 안티푸라민에도 고민은 있었다. 전보다 유명세는 분명 높아졌지만, 제품 매출이 1990년대까지 연간 20억~30억원에 정체됐기 때문이다.
이에 유한양행은 제품 라인업을 확장하며 승부수를 띄웠다. 2010년대 초반부터 파스와 스프레이, 파프 제품 4종(안티푸라민파프·안티푸라민조인트·안티푸라민쿨·안티푸라민한방 카타플라스마), 쿨 에어파스 등을 연달아 선보였다. 그 결과 현재 제품 라인업이 총 18종에 달한다.
기존 중장년 소비자를 넘어 젊은 층 공략에도 나섰다. 2019년 축구선수 손흥민을 광고 모델로 기용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실제 이 전략은 젊은 층 사이에서 안티푸라민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중장년층이 안티푸라민을 초록 통에 든 연고로 기억하는 것처럼, 젊은 세대는 안티푸라민을 ‘손흥민 파스’라고 부르곤 한다.
제품 다각화와 활발한 마케팅은 매출 성장으로 이어졌다. 2014년 매출 100억원을 돌파했고, 2019년과 2023년에는 각각 200억원, 300억원을 넘어섰다. 지난해 매출은 359억원을 기록했다. 유한양행은 계속해서 다양한 마케팅 활동과 신제품 개발을 통해 국내는 물론, 해외까지 판매를 확대한다는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