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자살 유족’을 어떻게 대할까?… ‘쉬쉬’는 답이 아니다
전종보 기자
입력 2023/02/15 17:48
[우리, 살자④] 그들의 ‘꾹 다문 입’과 ‘소리 없는 슬픔’
“남은 가족이 혹시 같은 선택을 하진 않을지 서로 눈치를 보고 고인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다시 고인의 이야기를 꺼내는 데 5년이 걸렸다. 자살도 죽음의 한 종류인데, 우리 사회는 아직 자살을 말할 수 없다.”
10여년 전 갑작스럽게 가족을 떠나보낸 A씨는 이후의 시간들을 이 같이 기억했다. 그의 말대로 우리 사회에서 자살은 아직까지도 ‘쉬쉬할 일’로만 여겨진다. 유족은 슬퍼할 겨를도 없이 고인이 자살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숨길지, 사실이 잘못 알려져 고인에 대해 안 좋은 말이 돌거나 유족을 비난하진 않을지 먼저 걱정해야 한다. 어려움·슬픔을 토로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 역시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렇게 고인의 죽음은 오랫동안 ‘말 못할 슬픔’으로 남는다.
◇자살 유족 10명 중 7명, 사망 이유 말 못해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자살 1건이 발생할 경우 주변 유족 5~10명이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국내 자살 사망자 수가 연간 1만3000여명(2021년 통계청 사망원인통계)에 달하는 점을 감안했을 때 많게는 한 해 10만명 이상이 자살 유족이 되는 셈이다. 자살 유족에는 배우자, 부모, 자녀, 형제, 친인척뿐 아니라, 친구, 연인, 직장 동료 등도 포함된다.
자살 유족 수가 수만명에 달하지만 고인이 자살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말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보건복지부가 2015년부터 2017년까지 자살 유족 952명을 대상으로 심리부검 면담을 실시한 결과, 72.3%(688명)가 고인의 자살 사망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고 답했다. 친한 친구, 직장 동료 등 친밀한 대상에게 말하지 못한 이들이 58.4%(402명)로 가장 많았고, 친인척에게 사실대로 알리지 못했다는 유족도 34.7%(239명)에 달했다. 말하지 못하는 이유에는 ‘상대방이 충격을 받을까봐’, ‘유족이나 고인에게 안 좋은 이야기를 할 것이 염려돼서’, ‘자존심이 상하고 창피했다’ 등이 있었다. 자살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자살 유족 A씨는 “자살 유족들은 사회적 낙인과 보이지 않는 오명, 이로 인한 수치심 때문에 서둘러 장례를 치르고, 비난을 우려해 사망 사실을 숨긴 채 고립된다”며 “자살 유족에 대한 편견과 낙인을 지울 수 있는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숨길수록 고통 심해져… 자살 생각도
갑작스럽게 가족 또는 지인이 떠나고 나면 큰 슬픔과 떠난 이에 대한 상실감, 그리움 등을 느낄 수 있다. 자살 유족의 경우 이 같은 감정과 함께, 가까운 사람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에 대한 충격과 눈치 채지 못했고 막지 못했다는 생각에서 오는 죄책감, 자신에 대한 분노를 느끼기도 한다.
더 큰 문제는 이 같은 감정들을 쉽게 털어놓을 수조차 없다는 점이다. 유족들은 고인이 자살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자살 사망 사실을 어떻게 숨길지 고민하고, 의도치 않게 알려지거나 잘못 낙인이 찍히진 않을까 우려한다. 이는 많은 자살 유족이 고립감을 느끼고 우울증, 수면장애와 같은 정신 건강 문제를 겪는 원인이기도 하다. 심하면 자살을 생각하는 단계까지 이를 위험도 있다. 경희대 정신건강의학과 백종우 교수는 “드러내거나 말하지 못할수록 고통은 가중되고 상실감도 커질 수밖에 없다”며 “고통, 죄책감 등이 심해지고 우울증으로 이어질 경우 삶에 대한 희망마저 잃게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묻기’보다 ‘듣기’를… “사회적 인식 개선 시급”
자살 유족에게는 위로와 지지, 지원, 그리고 인식 개선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살 또한 사망 원인의 한 종류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유족들이 자살 사망 소식을 알릴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고인이 사망한 이유를 지나치게 궁금해 하거나 명확한 근거도 없이 유족을 의심하고 잘잘못을 따져선 안 된다. 유족을 돕고 싶다면 묻기 대신 ‘듣기’를 권한다. 심리적 또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자살 유족에게는 ‘자살 유족 원스톱 지원 사업(심리 치료, 법률처리, 학자금, 사후 행정처리 등 지원)’이나 지자체에서 실시하는 자조 모임 등을 알아봐주는 것이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 한국생명의전화 하상훈 원장은 “유족이 가장 원하는 것은 아무 편견 없이 들어주는 것”이라며 “잊으라고 함부로 말하거나 충고하지 말고, 감정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도록 들어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유족들이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들이 지금보다 많아져야 한다”고 했다.
정부 역할도 중요하다. 자살에 대한 인식 개선에 앞장서는 한편, 시범 사업으로 일부 지역에서만 진행 중인 원스톱 지원 사업을 확대하는 등 자살 유족을 돌보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자살은 복지, 의료, 경제 등 여러 사회 시스템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발생하는 사건으로,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 사회 시스템 어느 곳에 문제가 있는지 발견할 수 있다. 백종우 교수는 “우리나라는 자살률 1위 국가임에도 고통은 여전히 개인의 몫으로 남아있다”며 “누구나 위기와 고통을 겪을 수 있으므로, 이에 대비하고 극복할 수 있는 사회적 인프라를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예방 상담전화 ☎1393, 정신건강 상담전화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청소년 모바일 상담 ‘다 들어줄 개’ 어플, 카카오톡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10여년 전 갑작스럽게 가족을 떠나보낸 A씨는 이후의 시간들을 이 같이 기억했다. 그의 말대로 우리 사회에서 자살은 아직까지도 ‘쉬쉬할 일’로만 여겨진다. 유족은 슬퍼할 겨를도 없이 고인이 자살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숨길지, 사실이 잘못 알려져 고인에 대해 안 좋은 말이 돌거나 유족을 비난하진 않을지 먼저 걱정해야 한다. 어려움·슬픔을 토로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 역시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렇게 고인의 죽음은 오랫동안 ‘말 못할 슬픔’으로 남는다.
◇자살 유족 10명 중 7명, 사망 이유 말 못해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자살 1건이 발생할 경우 주변 유족 5~10명이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국내 자살 사망자 수가 연간 1만3000여명(2021년 통계청 사망원인통계)에 달하는 점을 감안했을 때 많게는 한 해 10만명 이상이 자살 유족이 되는 셈이다. 자살 유족에는 배우자, 부모, 자녀, 형제, 친인척뿐 아니라, 친구, 연인, 직장 동료 등도 포함된다.
자살 유족 수가 수만명에 달하지만 고인이 자살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말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보건복지부가 2015년부터 2017년까지 자살 유족 952명을 대상으로 심리부검 면담을 실시한 결과, 72.3%(688명)가 고인의 자살 사망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고 답했다. 친한 친구, 직장 동료 등 친밀한 대상에게 말하지 못한 이들이 58.4%(402명)로 가장 많았고, 친인척에게 사실대로 알리지 못했다는 유족도 34.7%(239명)에 달했다. 말하지 못하는 이유에는 ‘상대방이 충격을 받을까봐’, ‘유족이나 고인에게 안 좋은 이야기를 할 것이 염려돼서’, ‘자존심이 상하고 창피했다’ 등이 있었다. 자살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자살 유족 A씨는 “자살 유족들은 사회적 낙인과 보이지 않는 오명, 이로 인한 수치심 때문에 서둘러 장례를 치르고, 비난을 우려해 사망 사실을 숨긴 채 고립된다”며 “자살 유족에 대한 편견과 낙인을 지울 수 있는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숨길수록 고통 심해져… 자살 생각도
갑작스럽게 가족 또는 지인이 떠나고 나면 큰 슬픔과 떠난 이에 대한 상실감, 그리움 등을 느낄 수 있다. 자살 유족의 경우 이 같은 감정과 함께, 가까운 사람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에 대한 충격과 눈치 채지 못했고 막지 못했다는 생각에서 오는 죄책감, 자신에 대한 분노를 느끼기도 한다.
더 큰 문제는 이 같은 감정들을 쉽게 털어놓을 수조차 없다는 점이다. 유족들은 고인이 자살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자살 사망 사실을 어떻게 숨길지 고민하고, 의도치 않게 알려지거나 잘못 낙인이 찍히진 않을까 우려한다. 이는 많은 자살 유족이 고립감을 느끼고 우울증, 수면장애와 같은 정신 건강 문제를 겪는 원인이기도 하다. 심하면 자살을 생각하는 단계까지 이를 위험도 있다. 경희대 정신건강의학과 백종우 교수는 “드러내거나 말하지 못할수록 고통은 가중되고 상실감도 커질 수밖에 없다”며 “고통, 죄책감 등이 심해지고 우울증으로 이어질 경우 삶에 대한 희망마저 잃게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묻기’보다 ‘듣기’를… “사회적 인식 개선 시급”
자살 유족에게는 위로와 지지, 지원, 그리고 인식 개선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살 또한 사망 원인의 한 종류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유족들이 자살 사망 소식을 알릴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고인이 사망한 이유를 지나치게 궁금해 하거나 명확한 근거도 없이 유족을 의심하고 잘잘못을 따져선 안 된다. 유족을 돕고 싶다면 묻기 대신 ‘듣기’를 권한다. 심리적 또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자살 유족에게는 ‘자살 유족 원스톱 지원 사업(심리 치료, 법률처리, 학자금, 사후 행정처리 등 지원)’이나 지자체에서 실시하는 자조 모임 등을 알아봐주는 것이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 한국생명의전화 하상훈 원장은 “유족이 가장 원하는 것은 아무 편견 없이 들어주는 것”이라며 “잊으라고 함부로 말하거나 충고하지 말고, 감정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도록 들어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유족들이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들이 지금보다 많아져야 한다”고 했다.
정부 역할도 중요하다. 자살에 대한 인식 개선에 앞장서는 한편, 시범 사업으로 일부 지역에서만 진행 중인 원스톱 지원 사업을 확대하는 등 자살 유족을 돌보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자살은 복지, 의료, 경제 등 여러 사회 시스템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발생하는 사건으로,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 사회 시스템 어느 곳에 문제가 있는지 발견할 수 있다. 백종우 교수는 “우리나라는 자살률 1위 국가임에도 고통은 여전히 개인의 몫으로 남아있다”며 “누구나 위기와 고통을 겪을 수 있으므로, 이에 대비하고 극복할 수 있는 사회적 인프라를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예방 상담전화 ☎1393, 정신건강 상담전화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청소년 모바일 상담 ‘다 들어줄 개’ 어플, 카카오톡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