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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깐한 미식일기] 나는 레시피를 ‘읽기로’ 했다

이지형 헬스조선 취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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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시피는 ‘활용’의 대상이지만, 때론 ‘독서’의 대상도 된다. 최적의 맛을 지닌 부추달걀비빔밥 레시피 하나를 만들기 위해 요리연구가는 얼마나 많은 상상을 할까? /사진=헬스조선 DB

올 추석엔 레시피를 읽기로 했다.
레시피를 읽는다?
레시피는 매뉴얼이다. 매뉴얼은 독서의 대상이 아니라, 활용의 대상이다. 예컨대 부추달걀비빔밥 한 그릇을 만들려면 이런 재료가 필요하다.

달걀 1개
부추 5줄기
간장 1/2큰술
참기름 1/2큰술
통깨 1/2큰술
현미밥 2/3공기
(『한 그릇 집밥 다이어트 레시피』, 최희정, 비타북스).

레시피가 담긴 책에는 제조 공정이 함께 정리돼 있고, 그걸 잘 따라 하기만 하면 맛난 요리가 뚝딱, 만들어진다. 그렇게 레시피를 '활용'하면 그만인데 그걸 ‘독서’한다? 기이한 취미를 가지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소설·에세이·자기계발서 모두 싫증나고 말았다!
나이 들면서 글씨가 빼곡한 책을 읽기 힘들다. 철학서나 인문서는 글씨만큼이나 추상적 어휘까지 빽빽해 집중이 불가(不可)하다. 나이 들고도 총기(聰氣)를 유지하는 분들은 물론, 그대로 철학·인문서 독서에 열중하면 되겠다. 어떤 경우든, 소설이 있지 않나? 다른 분들은 모르겠지만, 나이 들수록 소설의 존재 이유인 ‘허구’ 자체가 거슬린다. 현실에 집중하기도 버거운데, 왜 가상의 세계에 관심을 둬야 하나.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세계에 몰입해야 할 이유를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기 어려운 상황도 생긴다. 

소소한 일상을 다루는 에세이는 너무 소소하게 일상적이어서 싫다. 출판가의 오랜 효자였던 자기계발서도 멀리한지 한참 됐다. 책을 읽어서 자기계발이 되는지도 의문이거니와, 어렵사리 자기를 계발해 놓아도, 그렇게 계발된 자기를 제시할 곳이 마땅치 않은 나이가 돼버렸다. 시(詩)가 남는데, 시란 건 시를 쓰는 시인들을 위해 존재하는 문학 장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가끔.   

개인적인 흠결과 부족을 과도하게 일반화시키고 있단 걸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또래 중 비슷한 경지의 무(無)독서 인구가 적지 않다. 최근, 스마트폰의 제국주의만을 탓할 수 없는 건, 스마트폰 이전에도 지하철 독서 인구는 희귀했으니까. 누구도 ‘독서의 계절’ 따위를 특정하지 않는 시대다.

요리의 본질 역시 ‘개념의 조합’ 아닐까?
그에 비하면 레시피는 읽기 쉽다. 식재료들의 사진과 식재료의 총합인 요리의 사진이 전체 지면의 2/3다. 글은 많아 봐야 1/3이고 여백을 감안하면 그만큼도 안 된다. 읽기에 우선, 한가하다. 그러나 한가하고 편한 것만으론 시·소설·에세이·인문서·자기계발서의 대용품이 되긴 어렵다. 시간을 할애할만한 효용이 있어야 한다.

그 중 하나가 인류의 최고 발명품 중 하나인 요리의 본질에 대한 통찰이다. 요리의 본질……?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인류의 다른 발명품들처럼 요리도 ‘개념의 조합’이 아닐까. 요리는 식재료들의 조합과 조합의 방식(찌고, 볶고, 굽고, 삶고)에 의해 좌우되지만, 이때 뒤섞이는 건 식재료들만이 아니다. 하나의 요리가 탄생하려면, 특정 요리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먼저 그려져야 한다.

밀가루가 면이 되고, 빵이 되고, 떡이 되고, 만두피가 된 건 우연이 아니다. 제분을 통해 내 앞에 새하얀 밀가루가 수북하게 쌓였다고 치자. 이 밀가루를 반죽하고 치댄 후 면으로 만들지, 이스트로 발효시켜 빵으로 만들지, 이런저런 모양으로 쪄서 떡으로 만들지, 얇게 펼쳐서는 방금 전 갈아둔 고기와 야채를 푸짐하게 감쌀지는 순전히 부지런하고 정교한 상상에 의존한다. 그리고 상상은 개념들의 조합이다. 서양에서 건너간 포크커틀릿이 일본에 들어가 돈까스가 되고, 짬뽕과 짜장면만 있던 중국음식점에서 짬짜면이 나오려면 식재료 이전에 기존 요리의 개념이 이리저리 뒤섞여야 한다.

향 대신 색을 즐기는 ‘레시피 독서’의 맛
레시피 독서의 또 하나의 효용은 다이어트다. 먹고 싶은 걸 다 먹어가며 살을 뺄 순 없다. 그런데 음식을 섭취한다는 건, 단백질·지방·탄수화물을 위·장에 투입하는 행위를 넘어선다. 무언가 먹을 때 우리는 5대 영양소와 함께 맛(味)과 향(香)과 색(色)을 소비한다. 레시피 독서를 통해 우리는, 맛과 향을 포기하는 대신 더욱 강렬해진 색을 즐긴다. 맛과 향이 사라진 자리에서 증폭된 요리의 색은 점차 요리 자체가 되어간다. 훈련(?) 강도에 따라 우리는 식재료가 내뿜는 다양한 색들의 조합만으로 요리 하나를 온전히 탐닉할 수 있게 되고, 바로 그 순간 식욕과 다이어트가 한꺼번에 해결되는 동시에…….

마시고(飮) 먹으니까(食) 음식(飮食)이다. 허기진 내 몸 속으로 이 세상 한 조각 떠 넣어주는 일의 숭고와 쾌락을 어디에 비교하겠나. 그러나 때로는 현명한 제약이 우리를 더 즐겁게 한다. 눈으로 즐기는 음식, 읽는 레시피가 생각만큼 황당한 것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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