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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깐한 미식일기] 낮 12시를 앞둔 영양사의 불안

이지형 헬스조선 취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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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 12시, 점심시간의 시작을 앞둔 영양사들의 마음은 어떨까.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처럼 불안한 건 아닐까.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여러 직장을 전전하면서 몇 곳의 구내식당을 경험했다.
그때마다 구내식당과 사랑에 빠졌다.

찌개·탕·면에 나는 질렸다
구내식당이라고 다 같진 않다. 운영 주체에 따라 분위기와 식사의 질(質)에서 큰 차이를 드러낸다. 하지만 점심때마다 직장인들을 열렬히 호객하는 도심 식당들의 탕, 찌개, 면에 질리는 건 개인적 예민함 때문만은 아닐 게다. 자극적인 색깔의 국물에 담긴 빈약한 식재료가 탕과 찌개의 정체라면, 탄수화물의 양을 극대화해 다른 식재료들의 공간을 빼앗는 게 그들의 면 요리다. 매력 없는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음식들은 조미료 향만큼 뜨겁게 ‘원가 절감’의 의지를 표출한다.

그리고 밥의 문제가 남는다. 대부분의 식당들이 새벽 또는 전날 해놓은 밥을 그릇에 담아 온장고에 쌓아두었다가 주문과 함께 낸다. 과도한 호화(糊化)로 인해 생기를 잃은 밥에 풍미랄 건 없다. 차라리 떡을 먹지.

갓 지은 밥에서 솟아오르는 아지랑이를 보면……
구내식당은 어떤가. 갓 지은 밥으로부터 올라오는 아지랑이는 구내식당들의 전형적 풍경을 구성한다. 사실, 밥 하나만으로도 성패는 확연하다. 구내식당은 따뜻하고도 신선한 밥만으로도 여러 수(手)를 접고 들어간다. 거기에 화려하진 않으나 단골로 등장하는 배추 또는 시래기 된장국도 구내식당을 정겹게 한다. 원가 절감의 노력이 왜 없겠나. 그러나 운영자와 고객이 현장에서 맞닥뜨리는 자영(自營) 식당의 조급함과는 다른 차분함이 구내식당엔 스며들어 있다.

그래서 날마다 오전 11시를 넘기며 슬쩍, 구내식당의 메뉴를 확인하는 나의 눈빛은 초롱하다. 게다가 요즘 위탁하고 있는 직장의 구내식당 메뉴는 늘 두 가지 레시피를 옵션으로 낸다. 예컨대 화요일이라면…….

육개장
병아리콩밥, 어묵볶음, 두부구이&양념장, 부추양파와사비무침

짜장면
계란파국, 유린기, 단무지, 양파&춘장

육개장 vs 짜장면, 뭘 먹을까?
뭘 먹어야 하나. 여린 고사리 잘 익은 육개장에 와사비로 간한 부추무침을 곁들여야 할까. 아님, 달콤한 짜장에 쫄깃한 면을 버무려 입에 넣은 뒤 맑은 계란국으로 입가심해야 하나. 일손을 멈추고 간소하고도 명민한 레시피들 사이에서 진지한 고민을 하던 중, 불현듯 나 아닌 누군가의 고민, 내 고민은 상대도 안 될 만큼 심각한 누군가의 불안을 떠올렸다.


그건 바로 주방과 객실을 쉼 없이 오가며 노심초사할 영양사다. 전날의 저녁 또는 당일의 아침에 들어온 막대한 양의 식자재를 다듬으며 그는 조리사들과 함께 아침부터 분주했다. 매주 말, 매달 말이면 일주일 치 또는 한 달 치의 메뉴를 짜기 위해 고심한다.

생각해보라. 토, 일요일을 뺀 주 5일만 생각해도, 일주일이면 스무 개의 다른 메뉴가 필요하다. 날마다 두 가지 옵션을 갖춘 점심과 저녁 메뉴가 필요하니까. 그건 가사를 돌보는 주부의 고민과는 차원이 다르다. 수백 명이 먹을, 스무 개의 메뉴를 쉼 없이 준비한다는 것, 그것은 고단한 노동과 함께 엄청난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오랜 구상과 집요한 레시피 연구와 분주한 노동을 통해 점심 또는 저녁 준비를 끝낸, 대강 오전 11시 30분쯤의 영양사는 이제 평안할까. 구내식당 애호가로 정오만 되면 사무실을 박차고 나가는 나는 그게 늘 궁금했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식당을 찾는 사우들을 기다리는 영양사의 마음은 과연 적멸(寂滅)일까.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 아니 영양사의 불안
고심하던 나는 소설 제목 하나를 떠올리고 만다. 201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독일 작가 페터 한트케의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이다. 광활한 잔디 위에서 그는 얼마나 불안할까. 볼이 날아오기 전 10초 안팎의 정적, 그 동안 골키퍼가 감당해야 할 불안과 강박, 그리고 소외와 단절…….

낮 12시를 코앞에 둔 영양사들의 심리도 다르지 않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곧 식당으로 들이닥칠 수백의 사우들은 과연 짜장면을 택할 것인가, 육개장을 택할 것인가. 간밤의 수요 예측은 과연 적절했던 걸까. 점심시간이 끝난 후 퉁퉁 불어터진 면이 더미로 쌓이는 건 아닐까. 이 더운 날 육개장을 메뉴로 앉힌 건 누가 봐도 패착 아니었을까.

나는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을 능가하는, 영양사의 불안을 떠올리며 식당에 들어섰고 식당에 오기 전 마음먹은 대로 짜장면 쪽에 줄을 섰다. 어, 그런데 저기 순백의 위생 모자를 쓰고 가운을 걸친 분은 영양사? 하필이면 오늘 따라 육개장 쪽 주방에 다소곳이 서 있는 영양사를 보며 나는 많이 미안했고, 바로 눈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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