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약이 만병통치약?

과민성장증후군으로 진료받았다면 처방전을 들여다보자. 장 운동을 더디게 만드는 진경제와 함께 항우울제를 처방하는 경우가 있다. 설사와 변비가 번갈아 나타나는 병에 왜 우울증약을 쓸까? 항우울제는 장내 신경세포를 자극에 둔하게 만들어 장의 과민성을 덜어 주기 때문이다. 아랫배 불쾌감이 일으키는 ‘우울한 감정’을 누그러뜨리는 것은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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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헬스조선DB)


최초의 우울증약은 결핵치료제

원래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우울증을 치료하는 약이지만, 다른 질병 치료에도 많이 쓴다. 항우울제가 처음부터 우울증 치료를 목적으로 개발된 것은 아니다. 결핵약의 부작용인 ‘기분을 좋게 하는 효과’를 이용해서 만들어졌다. 1950년대 초 미국에서 결핵치료제 임상시험을 했었는데, 일부 환자에게서 약을 복용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생활이 활력적으로 변했다. 연구자들이 우울증 환자에게 직접 이 약을 투여하니, 2년 뒤 결핵치료제를 복용한 우울증 환자 중 3분의 2가 증상이 개선됐다. ‘항우울제’라는 말도 이때 처음 등장했다. 그러나 치명적인 간독성이 나타나서 1961년 시장에서 퇴출됐다.

현재 우울증이 아닌 다른 질병에 쓰이는 항우울제는 1980년대 후반 개발된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SSRI)’나 ‘선택적 세로토닌-노르에피네프린 재흡수 억제제(SNRI)’라는 두가지 계통의 약이다. 세로토닌, 노르에피네프린은 인체 내 신경전달물질인데, 사람의 뇌에 이런 물질이 줄어들면 우울증이 생긴다. SSRI와 SNRI는 이런 물질의 작용을 강화해 우울증을 치료하는약이다.

과민성장질환부터 금연치료까지

국내 항우울제 처방의 20~30%는 내과, 가정의학과, 신경과, 재활의학과 등 비(非)정신건강의학과에서 하고 있다. 우울증 외에 항우울제를 가장 많이 쓰는 질환은 만성통증이다. 만성통증 환자의 3분의 1은 우울증을 동반하고, 우울증 환자의 4분의 3은 두통.관절통. 복통 등과 변비 같은 신체 증상이 함께 나타난다. 만성통증환자가 항우울제를 먹으면 몸의 곳곳에서 신경을 타고 뇌로 전달되는 통증 신호를 세로토닌, 노르에피네프린의 신호가 중간에서 미리 만나 줄여 줌으로써 뇌가 통증을 덜 느끼게 한다.

신체가 정상 상태라면 그냥 지나칠 정도의 작은 자극에도 민감하게 반응해 통증으로 느끼는 섬유근육통이나 위에서 언급한 과민성장증후군은 세로토닌대사가 줄어서 생기기 때문에, 세로토닌의 작용을 강화하는 항우울제를 쓰면 증상이 개선된다. 다국적 제약회사 릴리의 항우울제 ‘심발타’는 미국식품의약국(FDA)에서 우울증 외에 말초신경병성 통증, 섬유근육통, 골관절염으로 인한 통증 등의 치료제로 정식 허가를 받았다.

폐경기 여성이 흔히 겪는 안면홍조도 항우울제가 누그러뜨려 준다. 폐경기안면홍조는 저용량의 여성호르몬을 보충해서 치료하는데, 적잖은 여성이 여성호르몬제제에 거부감을 갖고 있기 때문에 폐경 이후 안면홍조를 그냥 참고 넘긴다. 그런데 FDA는 지난해 노벤의 ‘브리스델’이라는 항우울제 성분의 안면홍조치료제를 허가했다. 이 약은 항우울제인 팍셀의 함량을 단순히 줄인 약이다. 또 월경전불쾌장애 환자 151명에게 항우울제를 3개월 동안 먹게 했더니 긴장·우울·불안감 등 월경전불쾌장애 증상이 완화되는 효과가 있으며, 항우울제를 고용량으로 쓸수록 증상 완화효과가 커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항우울제는 담배도 끊게 한다. 담배를 피우면 담배 속 니코틴이 뇌의 흥분과 관련한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 분비를 늘려 행복감과 만족감 등을 느끼게 된다. GSK의 ‘웰부트린’은 도파민재흡수를 억제하는 항우울제로, 흡연을 통해 니코틴이 몸속에 들어오지 않아도 체내 도파민 양이 증가해 담배 생각이 안 나게 만든다. 이 약은 우울증에도 쓰지만, FDA에서 금연치료제로허가받았다.

신경전달물질의 신호가 줄어들면 우울증이 생기지만, 거꾸로 다른 병이 있어도 이 신호가 줄어서 우울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알츠하이머성 치매 환자의 30~50%, 뇌졸중 환자의 27%, 심혈관질환자의 16~23%, 만성통증 환자의 20~30%, 당뇨병 환자의 9~27%는 우울증 증상이 있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또 우울증은 심장 질환, 뇌졸중, 당뇨병,천식, 암, 관절염, 골다공증 등의 위험요인으로 작용하며 이런 질병의 치료를 어렵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이런 질환의 치료 효과를 높이기 위해 항우울제를 원래 쓰는 약과 함께 처방하기도 한다. 암환자에게 수술과 항암 치료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암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의지를 심어 주는 것이다. 암환자에게 항우울제를 처방하면 암치료 과정에서 생기는 우울감을 이기고 치료 효과를 높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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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우울제는 금연 보조제나 과민성장증후군 치료제로도 많이 처방되고 있다. 체중감량제 리덕틸과 조루증 치료제인 프릴리지도 우울증약이 시작이었다. (사진=헬스조선DB)


발기부전약도 원래 우울증약

한편 항우울제로 개발되다가 운명이 바뀐 약도 있다. 원래 협심증치료제로 개발되다가 발기부전 치료제로 방향을 튼 비아그라와 비슷한 사례다. 다국적 제약사 메나리니의 조루증치료제 프릴리지도 시작은 항우울제였다. 우울증 임상시험에 참여한 환자 일부가 이 약을 먹으면 성관계 시간이 늘어난다고 보고하는 바람에 정신건강의학과(우울증) 대신 비뇨기과(조루증) 의사의 처방전에 오르게 됐다. 프릴리지 역시 세로토닌의 재흡수를 차단하는 기전을 갖고 있다. 세로토닌은 우울증뿐만 아니라 뇌의 사정 중추를 자극하는 기능도 있기 때문에, 프릴리지를 먹으면 이 신호를 막아 사정을 늦추는 원리다.

한때 선풍적인 인기를 끌다가 시장에서 퇴출된 살빼는 약인 애보트의 ‘리덕틸’도 처음엔 항우울제로 개발되고 있었다. 임상시험 과정에서 이 약을 먹으면 입맛이 없어져 식사량이 줄고 살이 빠지는 현상이 발견되면서 방향을 틀었다. 이 약은 심혈관 질환을 일으키는 부작용 때문에 2010년 퇴출됐다. 하지만 리덕틸 퇴출 이후에도 일부 개원가 의사들은 여전히 항우울제를 체중감량의 목적으로 처방한다. 하지만 항우울제의 식욕감퇴 효과는 6개월 정도 나타날 뿐 그 이후에는 내성이 생겨 식욕이 다시 돌아오며, 오래 복용하면 불면증이나 불안증 같은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