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7-01-11

‘쿨(cool)’만 찾다 얼어 죽을 수도…

정말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오랜 방황 끝에 드디어 안착을 하게 되나 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관계가 살짝 흔들립니다.

그래도 “난 너밖에 없어”란 말이 절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먼저 다가가 진심을 밝혀야 할 타이밍인데 선뜻 내키지 않습니다. ‘찌질하게’ 구느니, 차라리 쿨하게 떠나 보내자는 게 삶의 신조니까요. 꼭 이성관계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친구에게 서운한 것이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절대 내색을 하지 않습니다. 어려운 부탁은 받지도, 하지도 않습니다. 부담되는 관계를 맺는 일은 절대 거부합니다. 가끔은 기대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앉으면 눕고 싶어진다는 말이 있듯이 한 번 의지하면 매번 그러고 싶어질 까봐 무섭습니다. 의지하다 보면 내 안의 허튼 점을 내보이게 되는 것 아닙니까. 피치 못 할 갈등이 생겨도 싸우기보단 잽싸게 피하고 맙니다. 사람 냄새 진하게 풍기는, 끈끈한 관계는 사절입니다.

현대사회의 삶의 신조는 ‘쿨’인 것 같습니다. 21세기 백과사전 ‘위키피디아’는 ‘쿨(cool)’을 ‘언제 어느 상황에서나 안정감과 고요함을 유지하고, 자기조절을 잃지 않으면서 독립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매사 쿨한 사람들은 마치 화보 속 모델같이 멋져 보이지요. 그러나 너무 쿨하다 못해 콜드 쪽으로 기울어버린, 쿨에 중독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람 사이 상호작용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지만, 관계에 대한 태도는 냉장고 속 같이 서늘해졌습니다. 한겨울에도 에어컨 틀어놓고 반팔을 입고 있는 형국입니다. 아마 친밀함이 주는 감정의 직렬 연결을 갈수록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이 원인일 겁니다. 잘 정제된 공적인 감정을 적당한 거리에서 주고받는다면 헤어져도 별다른 후유증이 남지 않기 때문이죠.

그러나 날 것의 감정 그대로를 직렬로 연결해놓으면 그 자국이 쉽게 지워지지 않고 마음 안에 오래 남아있게 됩니다. 서로 좋게 오랫동안 간다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헤어지게 되면 그것처럼 괴롭고 찜찜한 일이 없습니다.

자존심도 문제겠지요. 인생을 돌이켜볼 때, 자존심을 다 내던지고 달려들 정도로 소중한 관계는 손에 꼽기 어렵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만큼 나는 소중하니까. 아무 감정도 오고 가지 않는 절대거리를 유지하고, ‘갈등 제로’의 쿨한 태도를 갖는 게 ‘기본옵션’이 됩니다.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으니 일단 마음이 아플 일이 없습니다. 안전합니다.

하지만 이런 삶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은 순도 100%의 하얗고 아름다운 감정만 주고받을 수는 없습니다. 미운정 고운정이 있어야 정이 들 듯, 쿨하게 좋은 정만 주고받는 건 불가능합니다. 쿨할 수록 섬과 해안 사이는 멀어집니다. 멀어질수록 안전하지만 외롭고 공허해집니다. 가끔은 다소 ‘없어보이더라도’ 매달리고, 속마음을 발산해보는 것이 당신이라는 섬에 사람들이 오고 갈 다리를 놓는 길이라면 어떻게 하실래요. 솔직히 다리를 놓는다고 위험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섬 안에 사람을 들인다고 자존심 상할 일도 별로 없습니다.

많은 현대인들이 지지고 볶고 사느니, 고고하게 ‘혼자놀기’를 즐깁니다. 추운 겨울에 미니 스커트 입는 것도 패션이고 개성입니다. 인간은 원래 외로운 존재라는 자기 최면만 걸 수 있다면 쿨한 인생도 꼭 나쁜 것만은 아니겠지요. 그렇지만 어느 날, 외로움이 뼈 속 깊이 스며들며 엄동설한에 얼어 죽을 수도 있다는 것, 그것이 쿨한 삶의 비극입니다.

/ 건국대병원 신경정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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