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이나 약국을 방문했을 때, 의사, 약사에게 반드시 알려야 하는 사실을 하나 꼽으라면 뭘까? 바로 자신의 약물 알레르기 이야기다. 약에 대한 알레르기는 약을 안전하게 사용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정보이다. 특정한 약을 복용하고 나서 가볍게는 두드러기, 심하게는 호흡곤란 같은 심각한 알레르기 부작용을 경험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이 발생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전체 약물 부작용의 10~15%를 약물 용량과 관계없는 과민반응으로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국에서 알레르기 유무를 물어보면 의아해하는 경우가 많다. 약물에 알레르기가 있다는 건 무슨 이야기일까?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만한 피린계 특이체질을 예로 들어 살펴보자.
피린계 소염진통제 주의해야
피린계 약물은 전문용어가 아니라, 설피린(다이피론), 아미노피린, 안티피린, 이소프로필 안티피린처럼 피린으로 끝나는 소염진통제를 통칭하는 말로 쓰인다(이 약들의 공식 명칭은 피라졸론 계열 소염진통제다. 하지만 발음이 어렵고 너무 전문적이라 피린계라는 말로 대신 굳어졌다). 피린계 약의 원조는 안티피린이다. 이 약은 1884년 독일의 화학자 루트비히 크노르가 개발한 것으로 역사상 최초의 효과적인 합성약이면서 해열 진통제이다.
안티피린은 약 성분이 아니라 상품명이다. ‘해열’을 의미하는 영단어인 ‘antipyretic’에, 약 이름 끝에 붙이는 ‘in’을 합쳐서 만든 말로 ‘해열시켜 주는 약’이란 의미다. 안티피린은 1929년 신문에 연재된 김동인의 《동업자》라는 소설 속에도 등장한다. 무면허치료사인 주인공 홍 선생은 철학을 전공한 사람이지만 의사인 척하며 만주를 누비고 다닌다. 홍 선생이 만병통치약처럼 처방하는 ‘약은 역시 안티피린과 위산뿐’이었다. ‘어떠한 병에든 식전약(食前藥)으로 안티피린, 식후약(食後藥)으로 위산이엇습니다.’ 이런 소설 내용을 보면, 당시 안티피린이 상당히 잘 알려진 약이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요즘에는 몇몇 복합진통제를 제외하고는 피린계 소염진통제가 들어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피린계 특이체질이라는 말을 소염진통제에 과민반응이 있다는 걸로 바꿔 생각해도 무방하다.
약을 병균으로 오해해서 생기는 문제
소염진통제에 대한 과민반응이 있으면 어떤 증상이 나타날까? 피부가 가렵고 붉어지거나 두드러기가 나는 등의 가벼운 증상에 그치는 경우가 대다수이지만, 간혹 얼굴이나 입술이 심하게 부풀어 오르는 경우도 있다. 우리 몸이 약물 또는 약물-단백질 복합체를 외부의 침입자로 잘못 인식하는 진짜 알레르기 반응이 있는 경우가 특히 심각하다. 병균의 침입에 신속하게 대처하도록 훈련된 면역체계가 오작동하기 시작하면 목이 부어오르고 호흡이 곤란해지는 치명적인 부작용을 경험하게 된다. 얼른 응급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 한 번이라도 약물에 과민반응을 경험한 적이 있다면, 병원에서 처방을 받거나 약국에서 진통제를 구입할 때 항상 자신이 소염진통제에 과민반응이 있다는 이야기와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알레르기 반응이 있는지 말하는 걸 습관으로 해야 한다.
요즘 같은 연말연시에 특히 주의할 점이 하나 더 있다. 술을 마시고 나면 약물에 대한 과민 반응이 더 심하게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한잔하고 나면, 약물 알레르기에 더해서 알레르기성 비염과 천식 증상이 나빠지거나, 두드러기, 피부가려움증도 더 심해진다. 음주 뒤에 이런 알레르기 증상이 심해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선 주정 발효 시에 생성된 히스타민이 술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히스타민은 특히 맥주와 와인에 고농도로 들어 있는데, 이에 더해 술 속의 알코올은 알레르기 반응과 관련된 면역세포(비만세포)를 자극하여 알레르기 반응을 촉진시키는 물질을 더 많이 쏟아내도록 자극하기도 한다. 게다가 인체는 섭취한 알코올을 분해하느라 바빠서 알레르기 증상의 원인이 되는 히스타민을 제대로 청소할 겨를이 없다. 그 결과, 음주 뒤에 히스타민은 더 많이 축적되고 약물에 과민반응이 나타날 가능성도 높아진다.
페니실린, 10명 중 1명은 알레르기 있어
소염진통제만 알레르기의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약물 알레르기는 면역반응의 일종이므로, 어떤 약이든 알레르기를 일으킬 수 있다. 소염진통제에 대한 알레르기가 다른 약에 대한 알레르기보다 조금 더 흔히 나타날 뿐이다. 그 외에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항생제이다. 페니실린의 경우, 환자 10명에 1명꼴로 알레르기를 보고할 정도로 과민반응이 빈번하다. 다행히 실제로 진짜 항생제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이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항생제 복용 후 가벼운 설사, 소화불량 등을 알레르기로 오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이는 면역반응과는 무관한 단순 약물 부작용이다.
광범위한 두드러기, 발진, 가려움, 호흡곤란 등의 심각한 알레르기 반응이 있는 사람의 경우 이를 모르고 약을 투여하면 생명에 위협이 될 수 있는데, 항생제에 알레르기가 있는지 정확한 여부를 알려면 병원에서 진단검사가 필요하다. 먹는 소염진통제 성분에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라면 붙이는 파스나 바르는 약에도 주의해야 한다. 이때도 알레르기 반응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파스를 붙였을 때는 약 성분이 아닌 접착제로 인해 알레르기 증상이 생기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접촉성피부염이나 화상을 입기도 한다. 파스로 인한 화상은 뜨거운 열 때문에 생기는 물리적 화상이 아니라 약품 때문에 생기는 화학적 화상이다. 이런 경우에는 즉시 파스 사용을 중지하고 병원에 가봐야 한다.
건강기능식품에 알레르기 반응이 있는 사람도 있다. 예를 들어 글루코사민 알레르기. 보통 글루코사민은 갑각류의 껍질을 화학적으로 처리해서 만들기 때문에, 새우·게·랍스터에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라면 조심하는 게 좋다. 보통 갑각류에 알레르기가 있다고 해도 껍질보다는 살, 즉 단백질 성분에 과민반응이 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을 수 있지만, 제품 제조과정에서 불순물이 들어갈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부작용이나 알레르기를 경험했을 때는 어떠한 약이 원인이 됐는지 꼭 확인해서 이름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부작용이나 알레르기 반응이 나타났는지 함께 기억해두면 더 좋다. 새해 병원이나 약국을 방문할 때면 항상 기억하자. 약물 알레르기가 있을 경우, 이를 미리 알리는 것은 자신의 건강을 지키는 최선의 방법이다.
정재훈
과학·역사·문화를 아우르는 다양한 관점에서 약과 음식의 이면에 숨겨진 사실을 탐구하는 데 관심이 많은 약사다. 현재 대한약사회 약바로쓰기운동본부 위원으로 활동 중이며, 방송과 글을 통해 약과 음식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대중에게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정재훈의 생각하는 식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