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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80명의 생물학적 자녀를 둔 남성이 자신이 제공한 정자로 태어난 아이의 법적 친부 지위를 주장했으나 법원이 이를 거부한 사연이 전해졌다./사진=가디언
비공식 정자 기증으로 약 180명의 생물학적 자녀를 둔 남성이 자신이 제공한 정자로 태어난 아이의 법적 친부 지위를 주장했으나 법원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난 21일(현지시각) 외신 가디언(The Guardian)에 따르면 영국 고등법원 가정법원은 ‘조 도너(Joe Donor)’라는 가명으로 활동해온 미국인 로버트 알본의 친부 확인 청구를 최종 기각했다. 재판부는 알본이 해당 아동의 유전적 아버지라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비공식적인 방식의 정자 기증을 근거로 법적 부모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공공 정책에 반한다고 판단했다.

알본은 온라인을 통해 정자 기증자를 자처하며 활동해온 인물로, 전 세계에서 약 180명의 자녀를 두었다고 주장해왔다. 그는 영국·미국·중국 등 여러 국가에서 정자를 제공했으며, 일부 경우 기증 과정에서 직접 접촉하는 방식이 문제로 지적되기도 했다. 알본은 기증 후 약속을 어기고 기증을 받은 가족들의 삶에 개입해 법적 친부 권리나 양육권을 주장하는 소송을 반복적으로 제기해 논란이 됐다.

이번 소송은 한 부부가 알본의 정자를 이용해 임신·출산한 뒤 관계가 단절된 이후 제기됐다. 해당 부부는 2020년 알본에게 연락해 기증을 의뢰했고, 두 번째 시도에서 임신에 성공했다. 아이는 2021년 태어났으며, 출산 사실을 알리는 연락 이후 양측의 접촉은 끊긴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 알본은 아이의 출생증명서에서 비생물학적 아버지의 이름을 삭제하고 자신을 친부로 등록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이번 사건은 그가 유사한 취지로 제기한 네 번째 소송이다.


재판부는 그의 행태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하며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타인을 통제하려는 성향이 있다”며 “법적 친부로 인정될 경우 어머니가 지속적인 불안 상태에 놓일 수 있고, 아동과 가족의 안정성을 해칠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아이 어머니 측 변호인 코니 앳킨슨은 “정자 기증을 고려할 경우 반드시 충분한 사전 조사와 법률 자문이 필요하다”며 “가능하다면 법적 친자 관계가 명확히 보장되는 공인 기관을 이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공인된 의료기관을 통하지 않은 개인 간 정자 거래는 HIV, 간염 등 감염병 여부나 유전 질환을 사전에 검증하기 어렵고, 향후 법적 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크다. 실제로 지난해에는 암을 유발할 수 있는 희귀 유전 변이 ‘TP53’을 가진 기증자의 정자가 사용돼 유럽 전역에서 수백 명의 아이가 태어난 사례도 보고된 바 있다.

또한 한 명의 기증자가 수백 명의 생물학적 자녀를 둘 경우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성장하다 근친혼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는 개인뿐 아니라 지역 사회의 유전적 건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동시에 아이가 겪게 될 정체성 혼란과 심리적 부담 역시 중요한 사회적 쟁점으로 꼽힌다.

한편, 우리나라의 경우 생명윤리법에 정자 기증 횟수에 대한 명확한 규정은 없지만, 대한산부인과학회 보조생식술 윤리지침에서는 한 공여자당 출생 자녀 수를 10명 이하로 제한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최수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