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민의 크리미널 마인드]
1995년 3월 20일, 도쿄의 월요일 아침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출근길 지하철은 붐볐고, 사람들은 익숙한 일상 속에서 하루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도쿄 도심의 주요 지하철 노선 다섯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수상한 일이 벌어졌다. 열차 안으로 들어온 남성이 검은 비닐봉지를 내려놓고 우산 끝으로 찌른 뒤 황급히 내렸고, 문이 닫힌 열차 안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눈이 보이지 않았고 숨이 막혔으며 경련을 일으켰다. 공포는 급격히 확산됐고, 열차가 다음 역에 도착했을 때 승강장까지 이미 혼란에 빠져 있었다. 같은 일이 여러 노선에서 동시에 반복되면서 도쿄 한복판은 순식간에 마비됐다. 비닐봉지 안에 있던 물질은 사린 가스였다. 신경계를 마비시키는 화학물질로, 호흡기와 피부를 통해 흡수되면 근육 경련과 호흡부전을 일으킨다. 밀폐된 공간에서는 특히 치명적이다. 이 사건으로 14명이 사망했고 6300명가량이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우발적 범행이 아니었다. 동일한 방식으로 다섯 개 노선에서 동시에 실행된 조직적 테러였다. 범인들은 두 명씩 짝을 이뤄 한 명이 열차 안에서 사린 가스를 살포하고, 다른 한 명이 역 앞에서 도주를 도왔다. 이들이 속한 집단은 당시 일본 사회에서 이미 논란의 중심에 있던 종교 단체, 옴 진리교였다.
수사가 진행되면서 일본 사회는 더 큰 충격에 빠졌다. 주요 실행범 가운데는 도쿄대, 와세다대, 게이오대 등 일본 최상위권 대학 출신 인물들이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단순한 추종자가 아니라 화학 물질을 제조하고 운용하는 핵심 인력이었다. 실제로 옴 진리교는 자체 화학 연구소를 운영하며 사린 가스를 생산했고, 이전에도 생물학 무기를 실험한 정황이 드러났다. 이들의 목표는 단순한 테러가 아니라 사회 혼란을 극대화해 국가 기능을 마비시키고, 궁극적으로 국가 전복까지 노리는 것이었다.
이 비극의 중심에는 교주 아사하라 쇼코가 있었다. 그의 삶은 거절된 자아의 서사에 가까웠다. 시각 장애와 경제적 결핍 속에서 성장한 그는 자신의 한계와 좌절을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사회적 핍박으로 인식해 갔다. 의과대학 진학을 통해 인정받고 싶었으나 신체적 한계에 가로막혔고, 정치인이 되겠다는 꿈도 반복된 실패로 좌절됐다. 현실에서 거절당한 자아는 결국 현실 바깥의 과대망상으로 밀려갔다.
그는 종교와 오컬트, 명상과 종말론을 뒤섞어 자신을 선택된 메시아로 격상시켰다. 자신을 따르는 자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교리는 종교의 언어를 빌렸지만, 실제로는 세상을 향한 복수의 논리에 가까웠다. 개인의 뒤틀린 자기애적 망상이 주변의 동조와 복종을 얻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한 개인의 기이한 믿음에 머물지 않는다. 집단적 신념이 되고, 현실을 파괴하는 폭력으로 변한다.
정신의학적으로 보면 이 사건은 개인의 병리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한 인간의 피해 의식과 과대망상이 집단에 의해 강화되고, 그 집단이 다시 구성원의 판단 능력을 잠식해 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초기의 비현실적 신념은 추종자의 반복적 확인을 통해 사실처럼 굳어지고, 그 신념을 유지하기 위해 외부 세계는 적으로 재구성된다. 이 과정에서 비판은 배신이 되고, 의심은 제거의 대상이 된다. 윤리적 판단은 이념에 종속되고, 폭력은 도덕적 행위로 둔갑한다.
특히 이 사건의 비극은 이런 과정의 핵심에 엘리트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지식은 비합리성을 교정하는 도구로 여겨지지만, 겸손과 함께 작동하지 않을 때 오히려 오만으로 변한다. 1990년대 일본은 버블 경제 붕괴와 고베 대지진 이후의 충격 속에 놓여 있었다. 과학도, 제도도, 기존의 성공 공식도 삶의 불확실성을 완전히 설명해주지 못하던 시기였다. 바로 그 틈을 교주의 절대적 맹신이 파고들었다.
이들은 공중부양이나 초능력 같은 사기극에 속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질문에 즉답을 주는 닫힌 체계에 매혹됐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죽음과 미래, 실패 같은 문제 앞에서 “모른다”를 받아들이는 능력이 부족할수록 절대적 해답은 더 강한 유혹이 된다. 복잡한 현실보다 완결된 서사가 심리적으로 더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이 남긴 질문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불안과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사회에는 언제나 단순한 답을 파는 이들이 등장한다. 복잡한 현실을 선과 악, 우리와 그들로 정리해주는 목소리는 불안한 사람들에게 쉽게 매력적으로 들린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타인에 대한 증오를 정의로 포장하는 순간, 위험은 이미 시작된다.
정신 건강의 중요한 축 가운데 하나는 모호함을 견디는 능력이다. 내가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겸허함, 세상이 흑과 백이 아니라 수많은 회색 지대로 이루어져 있음을 견디는 인내,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더라도 제거의 대상이 아닌 공존의 대상으로 남겨두는 감각이다. 이런 능력이 무너질 때 인간은 확신에 취약해지고, 확신은 폭력의 언어를 띠기 쉽다.
도쿄 지하철역의 비닐봉지는 오래전에 치워졌을 것이다. 그러나 타인을 제거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내면의 사린 가스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다른 이름으로 기화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 잔향이 우리의 양심을 마비시키기 전에, 우리는 다시 인간의 얼굴을 마주 보아야 한다. 도쿄의 그날 아침은 특별한 날이 아니었기에, 그래서 더 위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