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부모나 형제·자매를 돌보는 청소년과 청년, 이른바 ‘가족돌봄청년(영케어러)’들이 적지 않다. 전국적으로 10만 명 이상이 있을 것으로 추산되는 이들에게 간병의 무게는 더욱 가혹하다. 생계 보조와 가사노동 등 전방위적인 책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학업이나 또래 관계 형성 등 성장기의 소중한 경험마저 잃기 쉽기 때문이다.
올해 34세 조범희씨도 마찬가지였다. 20대 초반, 전역하고 대학 복학을 준비하던 시기에 갑작스럽게 닥친 어머니의 병은 그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뇌출혈로 쓰러진 어머니는 수술 이후 심한 뇌병변 장애를 안게 돼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생활이 어려웠다.
조씨는 첫 2년 6개월간 대학병원과 재활병원을 오가며 24시간 간병을 이어갔다. 이후 어머니의 상태가 일정 부분 안정되자 집으로 모시고 돌보는 방식을 택했다. 낮에는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고, 밤에는 직접 간병을 이어가는 생활이 10년째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건축을 전공하던 진로는 중단됐다. 대신 시간과 장소의 제약이 적은 영상 제작 일을 시작했다. 최근에는 10년간의 간병 경험을 콘텐츠로 풀어내며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그는 가족돌봄이라는 현실 속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이제는 같은 상황에 놓인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길을 고민하고 있다. 그를 만나 더 자세하게 물었다.
-어머니는 어떤 상태인가?
“‘심한 뇌병변 장애’ 상태다. 장기요양등급 1등급에 해당한다. 독립적인 보행이 불가능하며 언어 의사소통도 어렵다. 다만 TV를 보거나 시계를 보는 등 기본적인 인지는 가능한 상태다.”
-처음 쓰러지셨을 당시 상황은 어땠나?
올해 34세 조범희씨도 마찬가지였다. 20대 초반, 전역하고 대학 복학을 준비하던 시기에 갑작스럽게 닥친 어머니의 병은 그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뇌출혈로 쓰러진 어머니는 수술 이후 심한 뇌병변 장애를 안게 돼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생활이 어려웠다.
조씨는 첫 2년 6개월간 대학병원과 재활병원을 오가며 24시간 간병을 이어갔다. 이후 어머니의 상태가 일정 부분 안정되자 집으로 모시고 돌보는 방식을 택했다. 낮에는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고, 밤에는 직접 간병을 이어가는 생활이 10년째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건축을 전공하던 진로는 중단됐다. 대신 시간과 장소의 제약이 적은 영상 제작 일을 시작했다. 최근에는 10년간의 간병 경험을 콘텐츠로 풀어내며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그는 가족돌봄이라는 현실 속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이제는 같은 상황에 놓인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길을 고민하고 있다. 그를 만나 더 자세하게 물었다.
-어머니는 어떤 상태인가?
“‘심한 뇌병변 장애’ 상태다. 장기요양등급 1등급에 해당한다. 독립적인 보행이 불가능하며 언어 의사소통도 어렵다. 다만 TV를 보거나 시계를 보는 등 기본적인 인지는 가능한 상태다.”
-처음 쓰러지셨을 당시 상황은 어땠나?
“전역 후 복학을 준비하면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 때 어머니가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병원에 갔을 때는 이미 수술 준비 중이었다. 수술 성공 확률이 30%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에는 나이가 어렸고 상황이 너무 급박하게 돌아가서 현실감각이 없었던 기억이 더 크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어머니가 두통이나 혈압 문제를 종종 호소하셨지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걸 후회했다.”
-직접 간병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처음 대학병원에서 약 6개월간 입원한 다음 재활병원으로 옮겼다. 당시 휴학 상태였고, 병원을 오가느니 차라리 직접 간병을 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간병사 비용 부담 등의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내가 하면 어머니가 더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게 재활병원에서 2년을 살았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 같은데?
-직접 간병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처음 대학병원에서 약 6개월간 입원한 다음 재활병원으로 옮겼다. 당시 휴학 상태였고, 병원을 오가느니 차라리 직접 간병을 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간병사 비용 부담 등의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내가 하면 어머니가 더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게 재활병원에서 2년을 살았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친구들은 대학생으로
의 고민을 하고 있었고 나는 전혀 다른 상황에 있었다. 가끔 친구들을 만나 간병 경험에 대해 얘기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아졌다. 그래서 점점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스스로의 선택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그럼에도 항상 결론은 어머니한테 사랑을 많이 받았다는 것과 내가 아프면 그도 똑같이 했을 것이라는 식이었다.”
의 고민을 하고 있었고 나는 전혀 다른 상황에 있었다. 가끔 친구들을 만나 간병 경험에 대해 얘기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아졌다. 그래서 점점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스스로의 선택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그럼에도 항상 결론은 어머니한테 사랑을 많이 받았다는 것과 내가 아프면 그도 똑같이 했을 것이라는 식이었다.”
-간병을 하면서 어머니 상태는 어떻게 달라졌나?
“처음에는 의료진이 평생 의식불명 상태로 지낼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기적같이 의식이 돌아왔고, 사지마비 상태에서 오른팔을 일부 사용할 수 있게 됐다. 막대기를 이용해 간단한 계산도 할 수 있을 정도까지 회복됐다. 또 콧줄로 식사를 하던 상태에서 일반 식사가 가능해졌고, 가래 제거를 위한 석션과 기관 절개도 제거했다. 몸에 연결된 장치 없이 생활할 수 있는 상태까지 만든 것이 큰 변화였다.”
-집으로 모시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여러 기적 같은 순간들이 있었지만 그 이후 어머니가 예전처럼 돌아가는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도 있었다. 계속 재활병원에 있을 수만은 없는 상황에서 선택지는 집 아니면 요양병원이었다. 당시에는 엄마를 요양병원으로 보낸다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집으로 모시기 위해 식사와 호흡 관련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단계적으로 준비했다.”
-유튜브 등에 간병 관련 콘텐츠를 업로드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원래 건축을 전공했지만, 간병 상황과 맞지 않았다. 건축 분야는 프로젝트 단위로 지방 이동이 잦은데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이후 친구의 권유로 영상 편집을 시작했고, 집에서도 일할 수 있다는 점이 맞아서 계속 이어가게 됐다. 결국 학교도 자퇴하고 영상 제작 일을 하게 됐다.
그러나 전공자도 아니고 특출난 점도 없어 항상 자신감이 부족했다. 실제로 지난해에는 일도 많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내가 10년 동안 무엇을 했는가’를 돌아본 결과, 간병 경험이 가장 큰 자산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영상 제작 경험과 결합하면 나만의 콘텐츠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해 시작했다.”
“처음에는 의료진이 평생 의식불명 상태로 지낼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기적같이 의식이 돌아왔고, 사지마비 상태에서 오른팔을 일부 사용할 수 있게 됐다. 막대기를 이용해 간단한 계산도 할 수 있을 정도까지 회복됐다. 또 콧줄로 식사를 하던 상태에서 일반 식사가 가능해졌고, 가래 제거를 위한 석션과 기관 절개도 제거했다. 몸에 연결된 장치 없이 생활할 수 있는 상태까지 만든 것이 큰 변화였다.”
-집으로 모시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여러 기적 같은 순간들이 있었지만 그 이후 어머니가 예전처럼 돌아가는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도 있었다. 계속 재활병원에 있을 수만은 없는 상황에서 선택지는 집 아니면 요양병원이었다. 당시에는 엄마를 요양병원으로 보낸다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집으로 모시기 위해 식사와 호흡 관련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단계적으로 준비했다.”
-유튜브 등에 간병 관련 콘텐츠를 업로드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원래 건축을 전공했지만, 간병 상황과 맞지 않았다. 건축 분야는 프로젝트 단위로 지방 이동이 잦은데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이후 친구의 권유로 영상 편집을 시작했고, 집에서도 일할 수 있다는 점이 맞아서 계속 이어가게 됐다. 결국 학교도 자퇴하고 영상 제작 일을 하게 됐다.
그러나 전공자도 아니고 특출난 점도 없어 항상 자신감이 부족했다. 실제로 지난해에는 일도 많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내가 10년 동안 무엇을 했는가’를 돌아본 결과, 간병 경험이 가장 큰 자산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영상 제작 경험과 결합하면 나만의 콘텐츠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해 시작했다.”
-팔로워가 1만 명이 넘는 플랫폼도 있다. 콘텐츠 시작 이후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인가?
“일단 자신감이 올라갔다. 영상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응원해 주면서 내가 했던 선택이 의미 있었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 덕분에 미래에 대해서도 더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됐다.”
-앞으로 어떤 콘텐츠를 제작할 예정인가?
“간병 용품 관련 리뷰를 해보려고 한다. 또 간병 경험을 바탕으로 돌봄 케어 제품을 만들고 싶다. 특히 기저귀를 사용하는 환자들을 위한 엉덩이 세정제 제품에 관심이 있다. 간병 현장에서는 물티슈나 간단한 세정만 하는 경우가 많은데, 항균 효과를 높이고 욕창을 예방하는 방향의 제품을 생각하고 있다. 실제로 외국 제품을 사용해 효과를 봤고, 이를 개선한 제품을 만들고 싶다. 현재 샘플까지는 만든 상태다.”
-간병을 하면서 정책적으로 부족하다고 느낀 점은 없었나?
“어머니는 장애 1급이라 하루 4시간 정도는 정부 지원을 받고 있다. 서울시에서는 가족돌봄청년들을 위해 심리 상담 등을 지원해 준다. 기본적으로 정부가 노력하고 있다는 걸 느낀다. 다만 일자리 지원이 아쉽다. 간병과 병행하려면 재택근무나 생활 반경 내에서 가능한 일자리가 필요하다. 현실적으로 정부가 연결해 주는 일자리들은 가족돌봄청년들이 출근하기 어려운 형태가 많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내 이야기를 듣고 ‘나는 못 할 것 같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다. 나 역시 지금 다시 하라면 못 할 것 같다. 당시엔 어렸고, 에너지가 있었으며, 무엇보다 아버지와 누나가 역할을 나눠 함께했기에 가능했다. 간병은 개인의 의지만큼이나 환경과 구조가 중요하다. 그러니 누군가 간병을 포기한다고 해서 책임감이 없다고 비난할 수 없다. 각자의 상황을 존중하고, 간병을 ‘선택’할 수 있도록 사회적 구조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단 자신감이 올라갔다. 영상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응원해 주면서 내가 했던 선택이 의미 있었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 덕분에 미래에 대해서도 더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됐다.”
-앞으로 어떤 콘텐츠를 제작할 예정인가?
“간병 용품 관련 리뷰를 해보려고 한다. 또 간병 경험을 바탕으로 돌봄 케어 제품을 만들고 싶다. 특히 기저귀를 사용하는 환자들을 위한 엉덩이 세정제 제품에 관심이 있다. 간병 현장에서는 물티슈나 간단한 세정만 하는 경우가 많은데, 항균 효과를 높이고 욕창을 예방하는 방향의 제품을 생각하고 있다. 실제로 외국 제품을 사용해 효과를 봤고, 이를 개선한 제품을 만들고 싶다. 현재 샘플까지는 만든 상태다.”
-간병을 하면서 정책적으로 부족하다고 느낀 점은 없었나?
“어머니는 장애 1급이라 하루 4시간 정도는 정부 지원을 받고 있다. 서울시에서는 가족돌봄청년들을 위해 심리 상담 등을 지원해 준다. 기본적으로 정부가 노력하고 있다는 걸 느낀다. 다만 일자리 지원이 아쉽다. 간병과 병행하려면 재택근무나 생활 반경 내에서 가능한 일자리가 필요하다. 현실적으로 정부가 연결해 주는 일자리들은 가족돌봄청년들이 출근하기 어려운 형태가 많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내 이야기를 듣고 ‘나는 못 할 것 같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다. 나 역시 지금 다시 하라면 못 할 것 같다. 당시엔 어렸고, 에너지가 있었으며, 무엇보다 아버지와 누나가 역할을 나눠 함께했기에 가능했다. 간병은 개인의 의지만큼이나 환경과 구조가 중요하다. 그러니 누군가 간병을 포기한다고 해서 책임감이 없다고 비난할 수 없다. 각자의 상황을 존중하고, 간병을 ‘선택’할 수 있도록 사회적 구조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