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이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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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해 치료의 핵심은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사진=클립아트코리아
누구나 마음의 병을 겪을 수 있지만 쉽게 털어놓기 힘들고 때론 스스로 인정하는 것도 어려움을 겪는다. 헬스조선은 일산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이강준 교수의 칼럼을 연재해 ‘읽으면서 치유되는 마음의 의학’을 독자와 나누려 한다. 정신건강 문제를 풀어내고 치유와 회복의 길을 제시한다.(편집자주)


자해는 마음이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고 느낄 때 선택하는 극단적인 행동이다. 그러나 그 행동은 파괴를 향한 길이 아니라 오히려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절박한 외침인 경우가 많다. 

한 조사에 의하면 성인의 비자살적 자해 경험률은 12.6%, 청소년의 자해 경험률은 약 22.8%에 이를 정도로 우려할 수준이다.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른 자해는 유행처럼 번지거나 일시적인 충동이 아니라 감정 조절 회로가 붕괴되고 신경생물학적 기능이 손상된 결과일 수 있다.  

자해는 정신역동학적 관점에서 여러 의미를 가진다. 슬픔과 분노를 말로 담을 수조차 없을 때 자해를 통해 감정을 분출한다. 혹은 스스로를 탓하고 벌하려는 내면의 목소리가 자해를 부추기기도 한다. “나는 벌을 받아야 해”라는 잘못된 믿음이 자해를 일으킨다.  

혼란스럽고 공허한 마음속에서 살아있음을 확인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이 되기도 한다. 통증은 감정이 무뎌진 사람에게는 오히려 존재를 느끼게 해주는 신호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자해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하는 요청이기도 하다. “나를 좀 도와 달라”는 외침은 자해의 상처 위에 또렷이 새겨진다. 이러한 의미들은 모두 관계의 상처와 연결되어 있다. 버려질까 두려우면서도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은 욕구가 자해라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정신생물학적으로는 감정 조절을 담당하는 뇌 편도체 활성 과다, 전전두엽 억제 기능 저하, 세로토닌계 이상 등과 연관된다.

진료실에서 이런 말을 자주 듣는다. 

“죽을 마음은 없었어요. 그냥 지금의 이 고통과 혼란스러움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어떻게든 멈추게 하고 싶어서 그랬어요. 자해를 하고 나면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자해가 삶을 포기하려는 행동이라기보다 살고 싶어서 버틸 수단을 찾는 흔적임을 보여준다. 혼란스러운 감정 속에서 내가 통증을 만들고 조절할 수 있다는 생각이 일시적으로 안정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그러나 자해는 결코 감정을 다루는 건강한 방법이 아니다. 자살 시도와는 구분되어야 하며 두 행동은 목적과 의미가 다르다. 자살은 “내 삶을 끝내겠다”는 의도인 반면, 자해는 “지금의 힘든 감정 속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반응이다. 하지만 그 경계는 생각보다 얇아 자해가 반복되거나 고통이 누적되면 자살 위험을 높이는 중요한 경고 신호가 될 수 있다.

치료의 핵심은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수용과 ‘힘들지만 변화할 수 있다’는 희망을 동시에 인정하면서 감정을 조절하고 대인관계 기술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예를 들어,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릴 때 찬물에 손을 적시거나 짧은 산책을 하거나 호흡을 조절해서 감정을 안정시킬 수 있다. “힘들지만 행동을 잠시 멈출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연습은 충동과 행동 사이에 잠시 숨 쉴 공간을 만들어 준다. 

자해는 멈추라고 해서 멈춰지지 않는다. 대신 마음을 지탱해 줄 새로운 선택지가 필요하다. 숨겨진 상처와 갈등을 찾아보고 억눌린 분노와 버려질까 두려운 마음과 스스로를 탓하는 내면의 목소리를 함께 들여다봐야 한다. 다음 단계로 자해 대신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필요하다. 상처 받는 상황을 무조건 회피하기보다 힘들다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도움을 요청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감정은 더 이상 상처를 통해서 말하지 않아도 된다. 혼자만의 힘으로는 벅찰 수 있다. 주변 사람들과 가족들이 “나는 너를 믿는다”고 지지해주고 비난 대신 공감을 해주는 것이 강력한 치료제로 작용한다. 관계는 때로 상처를 만들지만 반대로 치유의 통로가 되기도 한다. 위기 시 즉각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안전망을 구축하고 치료가 지속될 수 있도록 학교와 가정, 그리고 의료가 긴밀히 협력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자해가 너무 심할 때는 약물 치료가 필요하다. 우울, 불안, 충동성을 조절하는 약물은 자해 충동을 감소시키고 감정이 격해지는 순간 행동으로 즉시 이어지지 않도록 완충 역할을 해준다. 평소에는 예민해진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고 무력감에 빠져들지 않도록 도와줄 수 있다.  

자해 치료는 한 가지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관계 속에서 지지를 확인하고, 감정을 다루는 힘을 기를 때 작은 변화들이 서서히 쌓여 버틸 수 있는 여력이 생긴다. 그 때 비로소 몸이 대신 말해야 했던 아픔들은 다시 표현의 언어로 돌아와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