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오늘이 안녕하길]
지하철에 타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스마트폰 화면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차량 내부에 어지럽게 붙어있던 광고도 예전만큼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정신건강의학과 입원 병동에 스마트폰이 허용되면서 병동 입원에 대한 저항이 많이 줄었습니다. 손 안의 스마트폰만 있으면 미지의 세계조차 두렵지 않다는 것일까요. 스마트폰은 그만큼 우리를 안심시킵니다. 그런데 정말 믿을만한 안심일까요?
스마트폰은 상상도 할 수 없던 편리함을 가져왔습니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 책가방에는 MP3, 전자사전, 지갑이 들어있었는데 지금은 이 모든 것이 스마트폰 하나로 합쳐졌습니다. 게다가 종일 생체신호를 감시해주는 웨어러블 기기(스마트 워치)까지 힘을 합쳐 나에 관한 모든 정보와 관심을 수집하고, 우리의 관심을 모을 수 있는 콘텐츠로 보답합니다. 우리 뇌는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쓰고 싶어 하기 때문에 모든 종류의 편리함이 압축된 스마트폰에 자연스럽게 의지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토록 의지하는 스마트폰은 우리의 마음 건강 환경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을까요?
스마트폰을 통해 만나는 세상은 굴절도가 매우 높습니다. 즉, 현실을 온전히 반영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잘 알려진 대로 ‘알고리즘’ 때문입니다. 알고리즘은 내가 관심있을 만한 정보를 끊임없이 보내줍니다. 당신의 관심을 얻고, 당신이 조금이라도 더 여기(스마트폰 속)에 머물게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나’를 기준으로 굴절된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면 모두가 나랑 같아 보입니다. 나와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을 만나면 예측이 안 되고 혹시라도 나에게 해를 끼칠까봐 불안해집니다.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맥락이 사라지면, 우리는 단편적인 신호에 매우 날카롭게, 때로는 공격적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스마트폰으로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 역시 굴절도가 매우 높습니다. 우리는 어떤 피드를 올릴까요? 가장 보여주고 싶은 모습, 가장 기억하고 싶은 모습일 것입니다. 모든 글은 독자를 상정하듯, 모든 피드는 화면 저편의 독자(혹은 청자)를 상정합니다. 인정 욕구는 본능이기에, 우리는 화면 저편의 독자에게 인정받고 싶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보여지고 싶은’ ‘기억되고 싶은’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상대방의 시선’을 기준으로 ‘인정받고 싶은 모습’을 보인다는 점에서 ‘본래의 나’와는 굴절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스마트폰 덕분에 과거 어느 시대보다 연결은 양적으로 과밀해졌지만, 숫자(좋아요, 팔로워 수, 랭킹)와 타인의 시선에 갇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외로움으로 빠지게 됩니다. 그 외로움은 또 다른 인정 자극을 찾고자 화면을 무한히 새로고침하게 합니다.
스마트폰은 멀티태스킹이 가능하지만, 그로 인해 더 많은 일을 요구받습니다. 책 ‘요즘 애들’의 저자 앤 헬렌 피터슨은 “기술 발전은 쉬는 시간을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일을 처리해야 할 의무를 가져다주었다”고 말합니다. 피드의 주인공들은 미라클 모닝, 오운완, 갓생 루틴을 손쉽게 해내는 것 같고, 기상천외한 재미를 누리며 사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도 매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아프고 힘들어 건너뛰는 날도 있을 것이고, 피드의 이면에 무기력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 사실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 뇌는 우리의 부족한 점을 집중 조명하고 스스로를 수치심에 내몰고 더 채찍질합니다. 그 가혹함에 보상하는 가장 손쉽고 빠른 방법은 스마트폰을 통해 얻게 되는 말초적이고 즉각적인 즐거움입니다. 이 고리는 반복되며 점점 깊어져 나중에는 스마트폰이 없으면 극도로 불안해집니다.
그 중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서 스마트폰에 대한 가장 큰 우려는 스마트폰이 스마트폰 없이 사는 삶과 경험의 기회를 차단한다는 것입니다. ‘불안세대’의 저자 조너선 하이트는 “스마트폰은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는 뻐꾸기와 같다”고 표현합니다. 뻐꾸기는 남의 둥지에 알을 낳습니다. 뻐꾸기의 알은 다른 새의 알보다 먼저 부화하고, 태어난 뻐꾸기 새끼는 나머지 알을 둥지 밖으로 밀어냅니다. 어미 새는 그것도 모르고 새끼 뻐꾸기에게 먹이를 물어다주며 제 새끼인 양 키웁니다. 어린 아이가 있는 부모는 “학교에 들어가서 어쩔 수 없이 스마트폰을 사줬는데, 그동안 좋아했던 책이며 장난감은 모두 뒷전이 되어버렸다”고 한숨을 쉽니다.
스마트폰 없이 사람들과 대화할 기회, 스마트폰 없이 시간을 보낼 기회를 겪지 못한 우리는 스마트폰 없이 무언가를 해야 할 때 극심한 불안을 경험합니다. 머리로는 디지털 디톡스니 연결되지 않은 삶이니 좋다는 단어들이 둥둥 떠다니지만, 그건 남의 말처럼 들리지요. 지금 내 손 안의 스마트폰이 없으면 밥을 먹을 때도, 운전을 할 때도, 사람을 만날 때도, 심지어 쉬어야 할 때조차 우리는 그 일을 온전히 경험할 수 없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쉴 때 스마트폰을 합니다. 그리고 그 시간을 후회합니다. 쉰 것 같은데 쉰 게 아닌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스마트폰 덕분에 시간은 흘러갔지만, 무엇도 해결된 것이 없음을 보며 좌절감은 더 커집니다. 어쩌면 스마트폰의 편리함은 우리의 비판적인 사고와 통찰하는 힘과 어려움을 견뎌내는 능력과 맞교환된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고 스마트폰이 없는 삶으로 돌아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문명은 일방향으로 진행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마트폰을 우리 삶에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지는 우리가 결정할 수 있습니다. 뻐꾸기가 남의 둥지에 낳은 알은 생태계에 무조건 나쁘기만 할까요? 아닙니다. 숙주 새는 가짜 알을 인식하고 배출하거나, 둥지를 포기하거나 종족 인식 신호를 정교화합니다. 이에 맞서 뻐꾸기도 생존 전략을 정교화하며 숙주 새와 뻐꾸기는 함께 진화합니다. ‘도파민의 배신’의 저자는 중독을 일으키는 모든 것들은 문화적 산물이며 문화가 없다면 중독도 없다고 말합니다. 스마트폰은 이 말에 딱 들어맞습니다. 문명의 발전 결과 우리 손에 쥐게 된 뻐꾸기 알. 이 뻐꾸기 알과 공생, 나아가 함께 진화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당연한 것을 의심하는 힘, 당연한 것에만 기대지 않는 마음, 관계맺는 방식을 돌아보는 용기가 아닐까요? 지금 바로 스마트폰을 덮어 보이지 않는 곳에 두고 지금 당신이 하고 있던 그 일에 온마음을 다해보면 어떨까요? 익숙함에서 벗어날 때는 불안하겠지만 더 풍성한 삶을 선물로 얻게 될 것입니다.
[본 자살 예방 캠페인은 보건복지부 및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대한정신건강재단·헬스조선이 함께합니다.]
스마트폰은 상상도 할 수 없던 편리함을 가져왔습니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 책가방에는 MP3, 전자사전, 지갑이 들어있었는데 지금은 이 모든 것이 스마트폰 하나로 합쳐졌습니다. 게다가 종일 생체신호를 감시해주는 웨어러블 기기(스마트 워치)까지 힘을 합쳐 나에 관한 모든 정보와 관심을 수집하고, 우리의 관심을 모을 수 있는 콘텐츠로 보답합니다. 우리 뇌는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쓰고 싶어 하기 때문에 모든 종류의 편리함이 압축된 스마트폰에 자연스럽게 의지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토록 의지하는 스마트폰은 우리의 마음 건강 환경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을까요?
스마트폰을 통해 만나는 세상은 굴절도가 매우 높습니다. 즉, 현실을 온전히 반영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잘 알려진 대로 ‘알고리즘’ 때문입니다. 알고리즘은 내가 관심있을 만한 정보를 끊임없이 보내줍니다. 당신의 관심을 얻고, 당신이 조금이라도 더 여기(스마트폰 속)에 머물게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나’를 기준으로 굴절된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면 모두가 나랑 같아 보입니다. 나와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을 만나면 예측이 안 되고 혹시라도 나에게 해를 끼칠까봐 불안해집니다.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맥락이 사라지면, 우리는 단편적인 신호에 매우 날카롭게, 때로는 공격적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스마트폰으로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 역시 굴절도가 매우 높습니다. 우리는 어떤 피드를 올릴까요? 가장 보여주고 싶은 모습, 가장 기억하고 싶은 모습일 것입니다. 모든 글은 독자를 상정하듯, 모든 피드는 화면 저편의 독자(혹은 청자)를 상정합니다. 인정 욕구는 본능이기에, 우리는 화면 저편의 독자에게 인정받고 싶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보여지고 싶은’ ‘기억되고 싶은’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상대방의 시선’을 기준으로 ‘인정받고 싶은 모습’을 보인다는 점에서 ‘본래의 나’와는 굴절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스마트폰 덕분에 과거 어느 시대보다 연결은 양적으로 과밀해졌지만, 숫자(좋아요, 팔로워 수, 랭킹)와 타인의 시선에 갇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외로움으로 빠지게 됩니다. 그 외로움은 또 다른 인정 자극을 찾고자 화면을 무한히 새로고침하게 합니다.
스마트폰은 멀티태스킹이 가능하지만, 그로 인해 더 많은 일을 요구받습니다. 책 ‘요즘 애들’의 저자 앤 헬렌 피터슨은 “기술 발전은 쉬는 시간을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일을 처리해야 할 의무를 가져다주었다”고 말합니다. 피드의 주인공들은 미라클 모닝, 오운완, 갓생 루틴을 손쉽게 해내는 것 같고, 기상천외한 재미를 누리며 사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도 매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아프고 힘들어 건너뛰는 날도 있을 것이고, 피드의 이면에 무기력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 사실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 뇌는 우리의 부족한 점을 집중 조명하고 스스로를 수치심에 내몰고 더 채찍질합니다. 그 가혹함에 보상하는 가장 손쉽고 빠른 방법은 스마트폰을 통해 얻게 되는 말초적이고 즉각적인 즐거움입니다. 이 고리는 반복되며 점점 깊어져 나중에는 스마트폰이 없으면 극도로 불안해집니다.
그 중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서 스마트폰에 대한 가장 큰 우려는 스마트폰이 스마트폰 없이 사는 삶과 경험의 기회를 차단한다는 것입니다. ‘불안세대’의 저자 조너선 하이트는 “스마트폰은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는 뻐꾸기와 같다”고 표현합니다. 뻐꾸기는 남의 둥지에 알을 낳습니다. 뻐꾸기의 알은 다른 새의 알보다 먼저 부화하고, 태어난 뻐꾸기 새끼는 나머지 알을 둥지 밖으로 밀어냅니다. 어미 새는 그것도 모르고 새끼 뻐꾸기에게 먹이를 물어다주며 제 새끼인 양 키웁니다. 어린 아이가 있는 부모는 “학교에 들어가서 어쩔 수 없이 스마트폰을 사줬는데, 그동안 좋아했던 책이며 장난감은 모두 뒷전이 되어버렸다”고 한숨을 쉽니다.
스마트폰 없이 사람들과 대화할 기회, 스마트폰 없이 시간을 보낼 기회를 겪지 못한 우리는 스마트폰 없이 무언가를 해야 할 때 극심한 불안을 경험합니다. 머리로는 디지털 디톡스니 연결되지 않은 삶이니 좋다는 단어들이 둥둥 떠다니지만, 그건 남의 말처럼 들리지요. 지금 내 손 안의 스마트폰이 없으면 밥을 먹을 때도, 운전을 할 때도, 사람을 만날 때도, 심지어 쉬어야 할 때조차 우리는 그 일을 온전히 경험할 수 없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쉴 때 스마트폰을 합니다. 그리고 그 시간을 후회합니다. 쉰 것 같은데 쉰 게 아닌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스마트폰 덕분에 시간은 흘러갔지만, 무엇도 해결된 것이 없음을 보며 좌절감은 더 커집니다. 어쩌면 스마트폰의 편리함은 우리의 비판적인 사고와 통찰하는 힘과 어려움을 견뎌내는 능력과 맞교환된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고 스마트폰이 없는 삶으로 돌아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문명은 일방향으로 진행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마트폰을 우리 삶에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지는 우리가 결정할 수 있습니다. 뻐꾸기가 남의 둥지에 낳은 알은 생태계에 무조건 나쁘기만 할까요? 아닙니다. 숙주 새는 가짜 알을 인식하고 배출하거나, 둥지를 포기하거나 종족 인식 신호를 정교화합니다. 이에 맞서 뻐꾸기도 생존 전략을 정교화하며 숙주 새와 뻐꾸기는 함께 진화합니다. ‘도파민의 배신’의 저자는 중독을 일으키는 모든 것들은 문화적 산물이며 문화가 없다면 중독도 없다고 말합니다. 스마트폰은 이 말에 딱 들어맞습니다. 문명의 발전 결과 우리 손에 쥐게 된 뻐꾸기 알. 이 뻐꾸기 알과 공생, 나아가 함께 진화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당연한 것을 의심하는 힘, 당연한 것에만 기대지 않는 마음, 관계맺는 방식을 돌아보는 용기가 아닐까요? 지금 바로 스마트폰을 덮어 보이지 않는 곳에 두고 지금 당신이 하고 있던 그 일에 온마음을 다해보면 어떨까요? 익숙함에서 벗어날 때는 불안하겠지만 더 풍성한 삶을 선물로 얻게 될 것입니다.
[본 자살 예방 캠페인은 보건복지부 및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대한정신건강재단·헬스조선이 함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