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폐고혈압학회 기자간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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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천대 길병원 심장내과 정욱진 교수/사진=정준엽 기자
지난 몇 달간 특정 신약의 허가·건강보험 등재에도 불구하고, 국내 폐고혈압 전문 의료진들은 “여전히 치료 환경이 미흡하다”고 재차 지적했다. 특히 학계에서는 미국 식품의약국(FDA) 허가 이후 30년 동안 국내에 들어오지 않은 치료제가 이달까지 별다른 진척이 없을 경우, 동일한 성분의 제네릭(복제약)의 도입을 준비할 전망이다.

◇"플로란 이달까지 못 들어오면… 벨레트리 도입 준비"
대한폐고혈압학회는 11일 여의도 페어몬트 앰배서더 서울 호텔에서 세계 폐고혈압의 달을 맞아 '폐, 미리 희망 캠페인' 기자간담회를 개최했다.

폐고혈압은 폐동맥·폐정맥·폐모세혈관 등 폐혈관의 혈압이 높아져 발생하는 난치성 질환으로, 전 세계 인구의 1%에서 발생한다. 국내에는 약 50만명의 환자가 있을 것으로 추산된다. 폐고혈압은 종류에 따라 크게 5개군으로 나뉘는데, 이 중 1군에 해당하는 '폐동맥고혈압' 환자는 약 6000명으로 추정되며 이들의 5년 생존율은 약 72%다.

이날 간담회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로 지적된 사안은 전 세계에서 표준 치료제로 쓰이는 '플로란(에포프로스테놀)'이 국내에 여전히 들어오지 않은 점이다. 플로란은 글로벌 제약사 GSK가 1995년 FDA의 승인을 받은 정맥주사로, 병이 나빠지는 것을 늦출 뿐만 아니라 생존율 개선까지 입증한 유일한 약이다. GSK는 FDA 허가 이후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플로란의 허가 신청조차 하지 않았고, 그 결과 한국은 38개 OECD 가입국 중 유일하게 플로란이 도입되지 않은 나라로 남아 있다.


GSK가 여태껏 플로란의 도입을 망설이는 것은 환자 수가 적을 뿐만 아니라, 통상 국내에서는 약가가 낮게 책정되기 때문에 사업성이 없을 것이라고 우려해서다. 여기에 본사의 플로란 사업부가 이미 해체됐고, 최근 주사에 필요한 기구인 펌프·어댑터에 관한 불안정성 문제도 제기되면서 설령 GSK가 국내 도입을 시도하더라도 기구 인증이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때문에 플로란이 앞으로도 국내에 도입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대한폐고혈압학회는 이번 달까지 플로란의 도입에 아무런 진전이 없을 경우, 오는 12월부터 동일 성분의 제네릭인 얀센의 '벨레트리'를 대신 도입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사실 벨레트리는 오리지널 의약품이 아니기 때문에, 플로란이 먼저 국내에 도입되지 않는 한 국내에 도입될 가능성이 매우 낮다. 벨레트리가 플로란보다 먼저 국내에 도입되기 위해서는 신약에 해당하는 임상 데이터가 필요하지만, 제네릭이기 때문에 동등성을 입증한 연구 데이터밖에 없어서다.

그러나 최근 학계에서 한국희귀·필수의약품센터를 통해 약물을 들여온 후 건강보험 적용도 추후 논의할 수 있는 방안이 있음을 확인하면서 상황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여기에 최근에는 벨레트리의 국내 도입을 주저했던 얀센이 입장을 호의적으로 바꾼 점도 영향을 미쳤다.

가천대 길병원 심장내과 정욱진 교수(대한폐고혈압학회장)는 "한국얀센도 사실 올해 초 벨레트리 관련 사업부를 축소하려 했으나, 학회와 얀센 수뇌부가 서로 논의한 끝에 회사 측에서 생각을 바꿨다"며 "본사 차원에서 도입을 준비하기로 결정을 한 상태이기 때문에 GSK의 결정에 따라 벨레트리의 도입을 고려할 수 있는 상황이다"고 말했다. 다만 정 교수는 "희귀의약품 센터를 통해 벨레트리를 도입하는 순간 플로란은 영원히 국내에 들어올 수 없게 된다"며 "환자들을 위해 마지막까지 두 제약사의 약을 모두 도입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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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란/사진=GSK
◇"초기부터 약 두 개 이상 사용해야… 접근 장벽 해결 필요"
환자들의 5년 생존율을 일본과 비슷한 90%대 수준까지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초기부터 두 개 이상의 약제를 적극적으로 쓰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현재 우리나라 급여 일반 원칙에 따르면, 치료는 단일 약제로 시작하고 병용요법은 증상이 호전되지 않거나 나빠질 경우 3개월마다 추가하는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를 개정해 처음부터 병용요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생존율 개선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인천세종병원 심장내과 김경희 과장(대한폐고혈압학회 진료지침이사)은 "2023년 국내 데이터에 따르면, 고위험군 환자에게 병용요법을 쓰고 저위험군 환자에게 단일요법을 쓰면 오히려 두 환자군의 생존율이 비슷해지는 모순이 생긴다"며 "이는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경구 2제 병용요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끔 해주는 것이 필요함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러나 국내 폐고혈압 치료제는 플로란 외에도 병용요법으로 고려할 만한 신약들이 여전히 허가되지 않았거나, 건강보험 급여 도입이 늦어지는 등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먹는 약 '타다라필'과 3군 폐고혈압 흡입제 '타이바소(트레프로스티닐)'는 아직 국내에서 허가되지 않았고, 바이엘의 먹는 약 '아뎀파스(리오시구앗)'는 최근 1군 폐동맥고혈압에는 급여가 인정됐으나 4군 폐고혈압인 '만성 혈전색전성 폐고혈압'에서는 비급여로 남아 있다.


이 외에도 지난 7월 허가된 MSD의 '윈레브에어(소타터셉트)'는 허가-평가-협상 시범사업 약제임에도 아직 비급여다. 허가-평가-협상 시범사업은 의약품의 허가·급여 평가·약가 협상 단계를 동시에 진행해 신약의 도입 속도를 높이고자 정부가 도입한 제도다.

이처럼 기존 약제 대비 효과가 높은 신약들이 사용 장벽에 가로막히는 상황은 의료진들이 최적의 약제 조합을 파악하는 데도 어려움을 준다. 정욱진 교수는 "아무리 복잡하고 어려운 환자 사례더라도 약만 제대로 공급이 된다면 질병 조절이 가능한 시기다"며 "모든 환자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도록 치료제라는 무기가 잘 도입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