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곁에서]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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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게티이미지뱅크
자살 충동이 드는 누구나 전화해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109 생명의 전화. 전문 심리 상담사에게 위로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생명의 전화에서 전화 또는 온라인 상담은 보통 소정의 교육을 받을 자원 봉사자가 한다. 현직 상담사가 참여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나, 상담 관련 지식이 없는 일반 시민도 참여할 수 있다. 일반 시민은 기초 상담 이론 10과목, 전화 상담 실무 관련 10과목을 들은 후, 견습 상담원 활동을 1년 거치면 정규 상담원 자격이 주어진다.

상담사의 말 한마디가 생명의 전화 이용자의 목숨을 좌우할 수 있다. 이에 생명의 전화 측에서 나름대로는 상담자의 자질을 관리하고 있지만, 실제 자살을 목전에 둔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하는 창구에 자원 봉사자를 배치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지적이 있다.

◇자살 위기 상담, 특화된 훈련 받은 상담자 필요
‘자살 위기 상담’은 다양한 상담 분야 중에서도 특수한 분야다. 상황의 급박함 때문이다. 예컨대, 학교 폭력으로 인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정서적 위기에 처한 사람에게도 빠른 도움이 필요하지만, 가정이나 경찰 등과 연계해 대응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는 있다. 그러나 자살 위기자를 발굴했다면 그 즉시 대응에 나서야 한다. 경찰 마음건강증진 프로그램 위탁기관인 휴노의 김성정 상담사는 “상담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하며 머뭇거리는 순간에 자살 위기자가 자살을 실행할 위험이 있다”며 “자살 위기자를 발굴하면 뛰어내리려고 올라간 곳에서 내려오도록 설득하고, 경찰·병원 등 관계 기관에 곧바로 도움을 청하는 일련의 행위가 자동반사적으로 일어나도록 훈련받은 사람이 자살 위기 상담 현장에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성정 상담사에 따르면 현직 상담사들조차 자살 위기 상담 교육을 따로 받은 적 없다면 실제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혼란스러워하는 경우가 많다. 생명을 구하려면 내담자가 자살을 시도하려 한다는 사실을 가족이나 경찰 등 타인에게 곧바로 알려야 하지만, 이 경우 원칙적으로는 내담자에게 들은 그 어떤 얘기도 외부에 발설하지 않는다는 상담 윤리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당장의 자살 위기를 넘겼더라도, 다시 자살을 시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더 심층적 상담이 필요하다. 자살·자해 예방 전문 상담센터 굿씨상담센터 박지란 대표는 “인생의 어려움을 해결할 방안으로 ‘자살’을 찾은 데에는 내담자의 성장 과정을 비롯한 삶의 여러 연모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며 “마음의 문을 닫은 상담자에게 아주 간단하고 사소한 질문만으로도 삶의 내력을 털어놓게 유도하려면 ‘자살 상담’에 특화된 고도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자원 봉사자의 상담 전문성 부족
그러나 지금은 훈련이 충분치 않은 자원 봉사자들이 자살 예방의 최일선인 생명의 전화에 배치돼 있다. 이에 상담 인력이 계속 바뀌는 것이 첫 번째 문제다. 상담사들 간에 사례를 공유하고 너 나은 접근법이 무엇일지를 논의하는 일이 지속돼야 자살 예방 노하우가 축적되는데, 자원 봉사자를 쓰는 경우 이런 논의를 이어나가기가 어렵다. 박지란 대표는 “상담 경험을 어느 정도 쌓았다 싶으면 나가는 봉사자가 많다”며 “인력의 드나듦이 잦으면 그 기관의 상담 전문성이 쌓이기 어렵다”고 말했다.

게다가 생명의 전화에서 제공하는 전화, 온라인을 통한 비대면 상담은 대면 상담보다 난도가 높다. 서울상담심리대학원대학교 상담심리학과 육성필 교수(자살 예방, 위기 관리 상담 전문)는 “자살 위기자가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릴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대면으로 대화할 때보다 상담을 이어나가기가 훨씬 어렵다”며 “가장 노련한 상담사들이 배치되어 있어야 할 곳에 지금은 상담 초심자들이 있는 것이 아이러니”라고 말했다.


무엇보다도, 충분한 훈련이 되지 않은 상담사가 자살 위기 상담을 계속하다 보면 상담사 본인에게 트라우마가 생길 위험이 있다. 김성정 상담사는 자살 위기 상담을 하다가 내담자에게 들은 이야기에 2차 트라우마가 생겨 알코올 중독이 된 상담사를 봤다. 그는 “적어도 3년 이상은 자살 위기 상담 분야에서 교육 실습을 받거나 상담 경력을 쌓은 사람이 생명의 전화 상담에 배치되어야 내담자도, 상담사도 지킬 수 있다”며 “상담사가 최선을 다했음에도 내담자가 자살을 택했을 때, 상담사에게 피드백을 주고 트라우마를 관리해줄 수퍼바이저도 자살 상담 기관마다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상담자에게, 그보다 더 숙련된 상담자가 상담 관련 조언을 해 주는 것을 수퍼비전이라 하고, 이 수퍼비전을 행하는 조언자를 수퍼바이저라고 한다.

◇자살 예방 전문가 양성해야… 국가 가격증 도입을
전문가들은 자살 상담 전문가의 특수성을 고려해, 이를 국가 자격증으로 신설해야 한다고 한목소리로 말했다. 현재는 극소수 대학에서 자살 예방 특화 커리큘럼을 운영하고 있을 뿐, 아무런 자격증이 없다. 앞서 말했듯 자살 예방 상담은 자칫 잘못하면 내담자가 생명을 잃을 위험이 있고, 자살 상담 훈련이 되어 있지 않다면 현직 상담사조차 트라우마를 얻을 수 있다.

또한, 즉각적 대응이 몸에 배야 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위기 상담과 현격히 다르다. 이에 별도 교육을 의무화하고, 그 교육을 받은 후에 평가를 통과한 사람만 자격증을 얻을 수 있도록 해야 자살 예방 상담의 품질을 관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성정 상담사는 “이미 현장에서 일하는 상담사도 이 자격이 있어야 상담 센터나 기관에서 자살 관련 업무를 할 수 있게 해야 한다”며 “지금은 현직 상담사라면 한두 시간 정도의 자살 상담 교육만 거친 후에 곧바로 현장에 투입되는데 이것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했다. 육성필 교수는 “적어도 2~3년은 자살 위기 관리, 자살 위험성 평가, 자살 유가족 관리 등 자살에 관련된 것들을 철저히 배우고, 수련 실습을 통해 지식을 체화한 후에 자살 예방 상담 현장에서 일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상담 심리 관련 석·박사를 마친 사람조차도 다시 400~500시간에 이르는 자살 예방 전문 교육을 이수해야만 자살 예방 현장에 투입될 수 있다. 김성정 상담사는 “나는 자살 위기 관리 분야를 5년간 공부·실습했는데, 그 기간에 다양한 내담자들과 자살 고위험군을 만났다”며 “그 경험이 있으니 현업 상담사가 되어 실제 현장에 나갔을 때, 체화한 대로 상담을 자동으로 하고 있더라”고 말했다.

육성필 교수는 “지금은 자살 충동을 느낀 사람이 제대로 된 상담을 받고 싶어도, 전국에 ‘자살 예방 상담’에 특화된 교육과 수련을 받은 상담자가 몇 없다”며 “자살 예방에 특화된 교육 커리큘럼이 여러 대학에 전공 트랙으로 개설되고, 레지던트가 대학병원에서 실습하듯 상담사 역시 실습받을 수 있는 기관이 만들어져야 하며, 나아가서는 자살 예방 상담 국가 자격증을 신설해 국민이 역량이 검증된 사람에게 상담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