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약史] 게보린

<편집자 주>
우리는 일반의약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유명한 약이라면 효능·적응증 정도는 이미 익히 들어 알고 있을 겁니다. 설사 모르더라도 약에 동봉된 사용설명서를 읽으면 됩니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서, 효능·적응증 이외의 정보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이를테면 약 이름에 담긴 뜻이나, 약의 개발 비화, 약을 만든 인물 또는 회사에 대한 이야기 등등 말입니다. [우리 약史]가 이처럼 설명서에는 나와 있지 않은 이야기들을 들려드립니다. 약의 역사(史)뿐 아니라, 약을 개발한 회사(社)나 약과 관련된 다소 사(私)적인 이야기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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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보린정 / 삼진제약 제공
두통약은 두통의 종류만큼이나 제품 종류가 다양하다. 그 수가 워낙 많아 웬만해선 경쟁에서 살아남기 힘들 정도다. 반대로 생각하면 현재까지 판매되는 제품들은 그만큼 오랜 시간 고정 소비층을 확보하며 살아남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국내 두통약 ‘게보린’도 그렇게 살아남은 약 중 하나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50년 가까이 판매되고 있으니, 가히 ‘한국인의 두통약’으로 불릴 만하다.

◇약효·광고 앞세워 출시 6년 만에 시장 1위 등극
게보린정의 시초는 삼진제약이 1977년 스위스 가이스트리와 협업해 발매한 ‘게보나정’이다. 2년 뒤 지금의 ‘게보린정’으로 제품명을 변경했다. 이 과정에서 제형도 기존 흰색 원형에서 분홍색 하트 모양으로 바꿨다. 여성 소비층을 공략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당시만 해도 게보린의 성공을 예견한 이는 많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시장 1위 제품이 연간 35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며 그야말로 ‘독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진제약은 새로운 제형과 아세트아미노펜 등 세 가지 복합 성분을 기반으로 한 해열 효과, 두통·치통·생리통·근육통·신경통 등 다양한 진통 효과, 빠른 약효 등을 앞세워 시장에 안착하기 시작했다. 강남길, 임현식, 송재호, 이경실, 하희라 등 친근한 연예인들을 광고 모델로 기용하며 제품 인지도를 높이는 데도 열을 올렸다. 그 결과, 예상을 뒤집고 출시 6년만인 1985년에 진통제 시장 1위로 올라섰다.

게보린이 이처럼 빠른 성장을 이룬 데는 광고 카피의 역할도 컸다. 1980년대 ‘맞다 게보린’이라는 카피를 활용해 광고를 시작한 후 ‘맞다’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퍼졌고, 이것이 제품 인지도 상승으로 이어졌다.


이와 관련해 1983년 방영한 이산가족 상봉 프로그램과 얽힌 짧은 일화도 있다. 당시 극적으 로 재회한 가족들이 ‘맞다, 맞다’를 연신 외치며 서로를 확인하고 끌어안는 모습이 전국민의 눈시울을 붉혔는데, 이 장면이 ‘맞다, 게보린’의 카피와 맞물려 제품 인지도를 한층 끌어올리는 계기가 됐다는 후문이다.

◇40여년 동안 42억정 생산… 제품 다변화 성공
게보린의 출시 후 현재까지 누적 생산량은 약 42억정에 달한다. 제약사에서 자주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약을 일렬로 세웠을 때 지구 4바퀴를 훌쩍 넘는 정도의 양이다.

삼진제약은 2019년부터 단일 제품이었던 게보린을 다양한 통증 유형에 맞춘 ‘맞춤형 진통제 브랜드’로 확장하기 시작했다. 기존 게보린정 외에도 ‘게보린 소프트’, ‘게보린 릴랙스’를 연이어 선보였다. 게보린정이 두통, 치통, 인후통 등 여러 통증 완화에 널리 사용되는 약이라면, 게보린 소프트는 생리통 완화를 위해 이부프로펜과 파마브롬을 복합한 제품이다. 게보린 릴렉스는 고함량 이부프로펜과 마그네슘을 복합하고 이중 연질 캡슐을 적용했으며, 주로 근육통 완화를 위해 복용한다.

과거와 비교하면 정제 크기 또한 작아졌다. 복용 편의성을 높이기 위한 것으로, 균질 과립화(분말이나 미세 입자 등을 일정한 크기로 만드는 과정) 기술을 활용해 흡수와 약효 발현 속도도 기존 대비 약 3배 높였다.

현재 삼진제약은 게보린 전 제품을 국내 공장에서 자체 생산하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반세기에 가까운 게보린 제조 경험·노하우가 축적돼 있다”며 “직접 제조·공급하기 때문에 해외 수입 시 발생하는 시간적·물리적 문제나 품절 문제없이 안정적으로 제품을 공급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