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이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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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의 화난 감정에 지배당할 때는 그 감정이 내 안의 불안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돌아보자./사진=클립아트코리아
누구나 마음의 병을 겪을 수 있지만 쉽게 털어놓기 힘들고 때론 스스로 인정하는 것도 어려움을 겪는다. 헬스조선은 일산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이강준 교수의 칼럼을 연재해 ‘읽으면서 치유되는 마음의 의학’을 독자와 나누려 한다. 정신건강 문제를 풀어내고 치유와 회복의 길을 제시한다.(편집자주)

“아주 사소한 일이었어요.”

진료실에 들어선 30대 주부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됐다.

“아이들을 혼내고 있었는데, 아무리 얘기를 해도 계속 말대꾸를 하는 거예요. 원래는 그렇게 심하게 야단치지 않으려고 했는데 순간적으로 화가 나니 자제가 되지 않았어요. 결국 소리 지르고 물건까지 던지고 말았어요. 나중엔 내가 왜 그랬을까 후회가 밀려오더라고요. 이런 제가 너무 싫고 두렵습니다.”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일이다. 순간의 감정은 그렇게 사람을 지배해 버린다. 사소한 일로 시작되었던 일이 커져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남긴다. ‘그렇게까지 화를 내지 않아도 될 일이었는데’하는 아쉬움과 후회가 생긴다.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숨어 있다가 어느 순간 튀어나와 가차 없이 상대를 할퀴고 자신 역시 상처를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 화가 날까? 표면적으로는 스트레스 때문이다. 쌓이고 쌓인 불만과 불안이 작은 자극에도 폭발한다. 이전엔 그냥 넘겼을 일들이 어느 순간 내 마음을 찌르는 비수처럼 다가와 나를 무너뜨린다. 그러나 화를 내는 순간에는 뒷일을 생각하지 못한다. ‘감히 나를 무시해?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 자존감이 손상되었다는 생각에 분노의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해버린다.   


화내는 사람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겉으로는 상대방에게 화내는 듯 하지만 정작 스스로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정신분석학적 측면에서 보면, 타인에게 쏟아낸 분노는 결국 내 안의 불안과 죄책감의 그림자다. 예를 들어, 여든이 넘은 아버지가 작은 실수를 했을 때 자식이 그것도 제대로 못한다고 화를 내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겉으로는 아버지에게 화를 낸 것 같지만 사실 그 순간의 분노는 “나는 왜 아버지를 더 잘 돌보지 못했을까?”하는 자기 비난이 화로 위장해 드러난 것이다. 아버지는 내 상처를 비추는 거울이었던 것이다.

비슷한 예는 일상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평소 돈 계산에 서툰 사람이 다른 사람의 계산 실수를 두고 화를 내거나 남들 앞에서 실수할까 늘 두려움이 많았던 엄마가 학교에서 발표하다 실수한 딸에게 “왜 준비를 제대로 못해서 창피를 당하니?”라며 크게 꾸짖는 경우가 그렇다. 이때의 분노는 아이의 부족함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상처와 불안을 자식의 모습 속에서 다시 본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생물학적으로는 충동을 억제하고 판단하는 전전두엽이 제 기능을 못하거나 분노, 공포의 감정을 일으키는 편도체가 예민해지면 쉽게 화가 난다. 이럴 때는 생각과 감정을 점검하고 호흡을 가다듬어야 한다. 항진된 교감신경을 진정시키고 스트레스 호르몬을 낮추고 신경전달물질 균형을 회복시켜야 한다. 노력해도 잘 낫지 않으면 약물 치료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겠다. 

갈수록 삶에 대한 여유가 없어지는 탓에 최근 들어 감정 조절의 어려움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화는 생리적 반응, 성격적 특성, 사회적 맥락이 얽혀 나타나는 복합적인 심리 현상이다. 특히 충동적이고 완벽주의적이며 통제 욕구가 강한 사람이 화를 더 많이 내게 된다.

지금 터져 나오는 화가 정말 상대 때문인지, 내 안의 불안에서 비롯된 것인지 먼저 자신에게 물어보자. 순간의 감정을 무작정 분출하기보다 호흡으로 잠시 멈추고 다른 방식으로 표현해보자. 불안과 짜증, 죄책감을 잘 조율하면 건강하게 화를 다스릴 수 있다. 분노 안에 숨어 있는 감정과 상처를 해석하고 진정시킬 때 화는 나를 지배하는 감정이 아니라 내 마음을 이해하게 해주는 내면의 신호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