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께 보내는 편지>

사람이든 세포든 영원히 사는 생물은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종말을 맞이해야 하죠. 그렇기에 어떤 존재든 열심히 사는 것만으로는 곤란합니다. 중요한 건 종말을 맞이하기까지의 과정입니다.
세포가 죽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화상 등 외부의 자극으로 물리적 손상을 입거나 세포가 노화돼 각질의 형태가 됐거나, 아포토시스 때문입니다. 아포토시스란 건강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일부 건강한 세포가 스스로 죽는 현상을 일컫는 말입니다. 변형이 일어난 세포 역시 스스로 자연사를 선택합니다. 그러나 간혹 그러지 않는 세포가 있는데, 그게 바로 암세포입니다. 인체에서는 암세포만이 유일하게 아포토시스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람도 어떤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사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열심히 산다는 것만으로는 옳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나이가 되면 퇴임하고 다음 세대를 위해 자연스럽게 자리를 양보하는 게 순리입니다. 또 계속해서 열심히 달려갔더라도 그게 좋은 종착지가 아니면 낭패입니다. 암도 따지고 보면, 그처럼 열심히 증식하며 사는 존재는 없을 정도입니다. 중요한 건 ‘열심’을 넘어 ‘어떤 방향성’을 가지느냐 하는 겁니다.
세상을 사는 데도 더불어 잘 사는 건 지혜가 필요합니다. 무조건 열심히만 살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암세포처럼 다른 세포를 짓밟을 수도 있지요. 이런 지혜는 암을 치료하는 데도 마찬가지입니다. 암에 걸렸다면 오히려 더불어 잘 사는 삶에 눈을 돌려야 합니다. 암을 치료하는 하나의 행동 철학으로 저는 ‘봉사’를 추천합니다.
“아픈데 무슨 봉사냐”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봉사는 감사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입니다. 지금 내 삶에 감사한다면 봉사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 셈입니다. 혼자 먹으려는 것으로 나누고, 나만 더 오래 살아야 한다는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언제든 나의 모든 것을 나눌 수 있고 살기 위해 발버둥 치기보다는 언제든 죽음을 겸허하게 맞이하겠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환자 가운데에는 지나친 욕심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누구나 살아야 할 이유가 있지만 때로 그렇지 않은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암에 걸렸다는 건 그 자체로 어느 정도는 원하는 수명대로 살 수 없다는 걸 뜻하기는 합니다. 투병에서 중요한 것은 ‘살아야 한다’는 의지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이르러서는 삶에 너무 집착하지 않는 초연한 자세가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최후의 순간까지 의학적인 모든 처치를 받아야 하고, 의사가 나에게만 더 많은 관심을 보여야 하고 내가 다른 환자보다 더욱 치료 경과가 좋아야 한다는 건 지나친 경쟁 심리입니다. 암 치료받을 때 경쟁만큼 위험한 건 없습니다. 경쟁하는 순간, 스트레스를 받고 그 순간 몸의 균형도 깨어지게 됩니다. 반대로 도를 닦는 것처럼 마음을 비우면 투병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자신이 가진 것들을 나누면, 그 비운 자리에 다른 것이 채워집니다. 그게 바로 진정한 삶의 기쁨입니다.
힘든 투병 중이더라도 이웃과 나눌 수 있는 거룩한 일들을 발견하고 실천해보세요. 우리의 작은 희생과 양보가 더 큰 사랑과 기쁨이 돼 우리 앞에 서 있을 겁니다. 자기 재산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고 재능을 다른 사람을 위해 쓰고 모든 집착을 버리고 순리에 따르는 자세로 임하면 그곳에 평화와 기쁨이 채워집니다. 이 평화와 기쁨은 마치 우물 바닥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물처럼 행복으로 가득 채울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내어놓는 작은 ‘봉사의 마중물’이 더 많은 생수를 길어 낼 것입니다. 그때 맛보는 삶의 기쁨은 모든 것을 움켜쥐고 있을 때 비할 바가 아닙니다. 암 치료를 할 때 구제 봉사 요법이 있는 것도 바로 이런 기쁨을 발견하자는 이유에서입니다.
종종 암에 걸려서까지 남아 있는 재산을 걱정하거나 자식들이 그것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고민하고 다소 무리하다 싶은 진료를 요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수술해 봐야 오히려 손해만 날 텐데도 수술을 요구하거나, 몸이 견딜 수 없는데도 약물 치료를 강행하기도 합니다.
“내가 저 치료(수술이나 약물 치료)만 받으면 더 좋아지겠지”라는 생각일지 모르지만, 현실은 딱히 그렇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인간의 몸은 과한 걸 받아들이면 반드시 탈이 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조금 덜하다 싶을 쪽이 몸에 무리가 없습니다.
힘든 치료를 고집하다 삶의 질은 물론 수명까지 단축하는 결과를 초래한 걸 종종 본 적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노령 환자의 수술과 항암 치료입니다. 85세 정도면 천수를 누린 나이라고 여겨도 될 겁니다. 특히, 암에 걸려서도 80세 이상까지 살았으면 충분히 살았다고 생각해도 크게 억울하지 않을 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정도 살았으면 뒷사람에게 비워주고 떠날 때가 된 거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어찌 보면, 다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겠지만 그런 각오로 치료에 임하라는 뜻을 담은 것입니다. 치료에서도 아집과 욕망을 비우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인생뿐만이 아니라 치료를 받을 때도 방향성이 중요합니다. 치료의 갈림길에서는 무리하게 고생하면서 더 사는 것과 마음 편하게 조금 덜 사는 것, 다시 말해 ‘삶의 질이냐, 양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이런 경우 저는 무리하지 않는 치료, 삶의 질을 고려한 치료를 권하곤 합니다. 인생도, 투병도 조금만 더 비우면 분명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의 선택이 바로 남은 삶의 질을 결정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언제든 후회하지 않을 최선을 선택하길 바랍니다.
오늘도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세포가 죽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화상 등 외부의 자극으로 물리적 손상을 입거나 세포가 노화돼 각질의 형태가 됐거나, 아포토시스 때문입니다. 아포토시스란 건강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일부 건강한 세포가 스스로 죽는 현상을 일컫는 말입니다. 변형이 일어난 세포 역시 스스로 자연사를 선택합니다. 그러나 간혹 그러지 않는 세포가 있는데, 그게 바로 암세포입니다. 인체에서는 암세포만이 유일하게 아포토시스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람도 어떤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사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열심히 산다는 것만으로는 옳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나이가 되면 퇴임하고 다음 세대를 위해 자연스럽게 자리를 양보하는 게 순리입니다. 또 계속해서 열심히 달려갔더라도 그게 좋은 종착지가 아니면 낭패입니다. 암도 따지고 보면, 그처럼 열심히 증식하며 사는 존재는 없을 정도입니다. 중요한 건 ‘열심’을 넘어 ‘어떤 방향성’을 가지느냐 하는 겁니다.
세상을 사는 데도 더불어 잘 사는 건 지혜가 필요합니다. 무조건 열심히만 살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암세포처럼 다른 세포를 짓밟을 수도 있지요. 이런 지혜는 암을 치료하는 데도 마찬가지입니다. 암에 걸렸다면 오히려 더불어 잘 사는 삶에 눈을 돌려야 합니다. 암을 치료하는 하나의 행동 철학으로 저는 ‘봉사’를 추천합니다.
“아픈데 무슨 봉사냐”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봉사는 감사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입니다. 지금 내 삶에 감사한다면 봉사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 셈입니다. 혼자 먹으려는 것으로 나누고, 나만 더 오래 살아야 한다는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언제든 나의 모든 것을 나눌 수 있고 살기 위해 발버둥 치기보다는 언제든 죽음을 겸허하게 맞이하겠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환자 가운데에는 지나친 욕심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누구나 살아야 할 이유가 있지만 때로 그렇지 않은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암에 걸렸다는 건 그 자체로 어느 정도는 원하는 수명대로 살 수 없다는 걸 뜻하기는 합니다. 투병에서 중요한 것은 ‘살아야 한다’는 의지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이르러서는 삶에 너무 집착하지 않는 초연한 자세가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최후의 순간까지 의학적인 모든 처치를 받아야 하고, 의사가 나에게만 더 많은 관심을 보여야 하고 내가 다른 환자보다 더욱 치료 경과가 좋아야 한다는 건 지나친 경쟁 심리입니다. 암 치료받을 때 경쟁만큼 위험한 건 없습니다. 경쟁하는 순간, 스트레스를 받고 그 순간 몸의 균형도 깨어지게 됩니다. 반대로 도를 닦는 것처럼 마음을 비우면 투병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자신이 가진 것들을 나누면, 그 비운 자리에 다른 것이 채워집니다. 그게 바로 진정한 삶의 기쁨입니다.
힘든 투병 중이더라도 이웃과 나눌 수 있는 거룩한 일들을 발견하고 실천해보세요. 우리의 작은 희생과 양보가 더 큰 사랑과 기쁨이 돼 우리 앞에 서 있을 겁니다. 자기 재산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고 재능을 다른 사람을 위해 쓰고 모든 집착을 버리고 순리에 따르는 자세로 임하면 그곳에 평화와 기쁨이 채워집니다. 이 평화와 기쁨은 마치 우물 바닥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물처럼 행복으로 가득 채울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내어놓는 작은 ‘봉사의 마중물’이 더 많은 생수를 길어 낼 것입니다. 그때 맛보는 삶의 기쁨은 모든 것을 움켜쥐고 있을 때 비할 바가 아닙니다. 암 치료를 할 때 구제 봉사 요법이 있는 것도 바로 이런 기쁨을 발견하자는 이유에서입니다.
종종 암에 걸려서까지 남아 있는 재산을 걱정하거나 자식들이 그것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고민하고 다소 무리하다 싶은 진료를 요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수술해 봐야 오히려 손해만 날 텐데도 수술을 요구하거나, 몸이 견딜 수 없는데도 약물 치료를 강행하기도 합니다.
“내가 저 치료(수술이나 약물 치료)만 받으면 더 좋아지겠지”라는 생각일지 모르지만, 현실은 딱히 그렇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인간의 몸은 과한 걸 받아들이면 반드시 탈이 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조금 덜하다 싶을 쪽이 몸에 무리가 없습니다.
힘든 치료를 고집하다 삶의 질은 물론 수명까지 단축하는 결과를 초래한 걸 종종 본 적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노령 환자의 수술과 항암 치료입니다. 85세 정도면 천수를 누린 나이라고 여겨도 될 겁니다. 특히, 암에 걸려서도 80세 이상까지 살았으면 충분히 살았다고 생각해도 크게 억울하지 않을 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정도 살았으면 뒷사람에게 비워주고 떠날 때가 된 거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어찌 보면, 다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겠지만 그런 각오로 치료에 임하라는 뜻을 담은 것입니다. 치료에서도 아집과 욕망을 비우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인생뿐만이 아니라 치료를 받을 때도 방향성이 중요합니다. 치료의 갈림길에서는 무리하게 고생하면서 더 사는 것과 마음 편하게 조금 덜 사는 것, 다시 말해 ‘삶의 질이냐, 양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이런 경우 저는 무리하지 않는 치료, 삶의 질을 고려한 치료를 권하곤 합니다. 인생도, 투병도 조금만 더 비우면 분명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의 선택이 바로 남은 삶의 질을 결정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언제든 후회하지 않을 최선을 선택하길 바랍니다.
오늘도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 암 극복을 위한 필수 지침, 아미랑
암으로 지친 마음 달래는 힐링 레터부터 극복한 이들의 노하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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