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민 원장의 인간관계 설명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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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클립아트코리아
“그래서 언제로 약속 잡을까?”라는 메시지에 읽음 표시만 남고 답을 쉽사리 보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내 개인적인 고민이나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면 농담으로 화제를 돌리기도 한다. 함께 식사를 하자거나 함께 하자는 제안에 습관처럼 “혼자가 편하다”라는 말이 돌아온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일컬어 “저 사람은 벽을 친다”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과 항상 가까워야 하는 것은 아니고 남들과 적당한 경계를 그어 놓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모든 벽이 같은 의미는 아니다. 어떤 벽은 단절과 고립을 만든다. 반면 어떤 경계는 나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관계를 오래 유지하기 위해 세워진다. 벽을 치는 대신 경계를 세우는 법을 알면, 관계는 덜 상처받고 더 오래 지속된다. 벽을 친다는 것과, 경계를 잘 세운다는 것 과연 어떤 의미일까?

벽 뒤에는 상처받은 마음이 있다
사람들이 벽을 치는 이유는 단순히 상대가 싫어서가 아니다. 그 안에는 저마다의 사정이 숨어 있다. 어떤 이는 가까워질수록 상처받았던 경험이 반복되면서, ‘친밀함은 곧 위험’이라는 공식을 뇌에 새겨버린다. 그래서 애써 다가온 상대에게도 차갑게 굴며 거리를 두는데, 이는 미워서가 아니라 다시 다칠까 두려워서다. 실제로 “가깝게 지내면 또 배신당할 거야”라는 생각 때문에, 누군가의 친절을 오히려 불편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또 다른 이는 늘 주변의 기대와 요구에 맞추며 살아오다 보니, 누군가의 작은 부탁이나 질문에도 ‘내가 또 끌려가겠구나’ 하는 불안을 느낀다. 그래서 “오늘 저녁에 잠깐 볼래?”라는 단순한 제안조차 숨 막히는 통제처럼 받아들이고, 대화를 닫아버리는 것이다. 결국 차갑게만 보이는 그 벽 뒤에는, 사실은 상처받을까 봐 움츠러드는 마음과 내 삶의 주도권을 잃지 않으려는 간절한 몸부림이 숨어 있다.

경계란 거절이 아니라 친절한 안내를 의미한다
벽과 경계는 닮은 듯하지만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벽은 말 그대로 단단히 닫아버리는 것이다. “묻지 마라, 다 싫다, 가까이 오지 마라”라는 차가운 신호다. 반면 경계는 닫힘이 아니라 조건부 개방이다. “지금은 조금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8시에 이야기하자”라든가, “문자로 먼저 개요를 주면 대면이 더 편하겠다”처럼 구체적인 안내가 담겨 있다. 벽은 상대를 밀어내지만, 경계는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사용설명서를 건네준다. 그래서 경계가 있을 때는 관계가 끊어지지 않고 유지되며, 불필요한 소모가 줄어든다. 중요한 건 벽을 완전히 허물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벽에 작은 문과 창문을 달아, 언제·어떻게 열릴 수 있는지 서로 알 수 있게 만드는 것, 그것이 관계를 덜 아프게 오래 가게 하는 비밀이다.

내 마음에 문과 창문을 내는 세 가지 방법
벽을 경계로 바꾸는 일은 거대한 공사가 아니다. 집에 창문 하나, 작은 문 하나를 내듯 일상의 말과 태도를 조금만 바꾸면 된다.


첫째, “오늘은 안 돼”라며 문을 강하게 걸어 잠그기보다 “오늘은 바쁜 일이 있어서 그런데 내일 아침에 이야기해요”라고 말해보자. 상대방은 앞이 꽉 막힌 듯한 기분 대신, 내일 아침이면 다시 이야기 할 생각에 불편함을 느끼지도 않거니와 오히려 배려 받았다는 기분까지 느낄 것이다. 상대는 무시 받았다고 느끼지 않고, 당신은 한숨 돌릴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둘째, 대화의 방식을 정하는 것도 중요하다. 어떤 사람은 긴 대면 대화보다 문자나 짧은 음성이 훨씬 편한 게 사실이다. “문자로 먼저 어떤 내용인지 미리 알려주시겠어요?”라는 말은, 건물 앞에 출입 안내문을 미리 써 두어 상대방과 나를 배려하는 것과 비슷하다. 상대는 어떻게 들어가고 행동해야 할지 더 알게 되고, 이로 인해 서로간에 불편함은 훨씬 줄어든다.

셋째, 벽을 허물어야지 하는 생각에 처음부터 모든 걸 다 드러내지 않아도 된다. 건강한 경계라는 것은 적절한 거리에서 내가 괜찮다고 생각한 것들을 하나씩 나누어도 충분하다. 마치 큰 정원을 한 번에 공개하기보다, 작은 화단부터 보여주는 것처럼 말이다. 작은 개방이 반복될수록 신뢰는 쌓이고, 차가웠던 벽은 자연스럽게 안전한 경계로 변한다.

결국 경계를 만든다는 것은 벽을 완전히 허물어트리라는 것이 아니라, 나와 상대방 사이에 열고 닫을 수 있는 문이 달린 튼튼한 길을 내는 것에 가깝다. 서로가 안심하고 오갈 수 있는, 그리고 필요하면 거절할 수 있는 문과 창문이 있을 때 진정으로 안전하고 건강한 관계라고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