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의 사생활]
병이 생기는 순간, ‘환자’라는 한 단어에 삶이 가려진다. 그러나 질병 너머로도 삶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헬스조선이 환자라는 틀 너머 한 사람의 온전한 이야기를 전한다. [편집자주]
“앞으로 시력을 완전히 잃게 되더라도 눈이 보일 때 혼자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보자고 마음 먹었다. 파리 미술관 가보기, 엄마에게 미역국 끓여드리기, 목소리 녹음하기 등등. 소박하지만 하나씩 이루다보니 살아가는 원동력이 됐다.”
어셔증후군으로 두 살 때 청력을 잃고 이후 시야까지 좁아진 구경선(43·충북 제천시)씨는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일러스트 작가로 활동 중이다. 그의 이야기는 토끼 캐릭터 ‘베니(BENNY)’를 통해 세상에 닿는다. 베니는 청각장애가 있는 구 작가를 대신해 소리를 듣고 마음을 전하는 분신 같은 존재다. 8cm 남짓의 좁은 시야지만, 베니를 통해 구 작가가 보여주는 세상은 넓고 깊다. 제천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나 이야기 나눴다.
-언제 어셔증후군 진단을 받았나?
“두 살 때 청력을 잃었고, 이후 시야가 좁아졌지만 둔감한 성격 탓에 오랫동안 눈치 채지 못했다. 밤에 잘 안 보이는 걸 야맹증이라고만 생각했다. 20대가 되면서부터 주변 사람을 인지하지 못했고, 밤에 혼자 다니는 게 어려워졌다. 한 번은 계단을 못 보고 내리 걷기만 하다가 떨어져 깁스를 한 적도 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눈이 완전히 안 보이는 게 아니어서 시각장애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2013년, 31살이 돼서야 비슷한 증상을 겪은 지인을 둔 친구가 진료를 권했다. 그제야 망막색소변성증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됐고 어셔증후군을 진단받았다. 이미 청력을 잃었는데 시력까지 잃게 된다는 사실에 슬픔과 분노가 이어졌다.”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처음에는 시야가 점점 좁아지다 결국 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이 두렵고 막막했다. 하지만 필리핀 선교 여행 이후, 당장 세상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자는 마음이 더 커졌다. 아직 실명을 막을 치료제는 없지만, 그 안에서 내가 실천할 수 있는 건강관리를 시작했다. 운동이 눈 건강에 좋다는 말을 듣고 매일 아침 30분씩 스텝퍼, 버피 테스트 등 유산소 운동을 했다. 언제 시력이 더 나빠질지 모르기 때문에 매주 한 번씩은 손끝으로 점자를 읽고 밤에는 지팡이를 짚고 걸어다니는 연습을 했다. 다행히 지금까지 시야가 더 나빠지지 않고 유지되고 있다.”
-선교 여행이 마음가짐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어셔증후군 진단을 받았을 당시 선교 여행을 이틀 앞둔 상태였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지만 예정대로 필리핀에 방문해야 했다. 2008년 싸이월드 스킨작가로 데뷔하면서 '내가 되고 싶은 나라'라는 미술 선교 프로그램을 시작했는데 필리핀이 네 번째 국가였다. 그곳에서 사진작가를 꿈꾸는 한 소년을 만났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모습을 그려줬는데, 그림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밥을 먹을 때에도 소중하게 품에 안고 다니더라. 큰 태풍으로 피해를 입은 소년이었는데 자신의 꿈이 담긴 그림을 소중히 여기는 모습에 감동했고 내 안의 분노가 그때부터 사라졌다. 아직 세상을 볼 수 있고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자는 마음이 커졌다. 덕분에 이후로도 미술 선교를 계속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필리핀, 남아공, 베트남, 네팔, 우간다, 캄보디아 여섯 개국을 방문했고 30개국을 채우는 게 목표다.”
“어셔증후군 진단을 받았을 당시 선교 여행을 이틀 앞둔 상태였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지만 예정대로 필리핀에 방문해야 했다. 2008년 싸이월드 스킨작가로 데뷔하면서 '내가 되고 싶은 나라'라는 미술 선교 프로그램을 시작했는데 필리핀이 네 번째 국가였다. 그곳에서 사진작가를 꿈꾸는 한 소년을 만났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모습을 그려줬는데, 그림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밥을 먹을 때에도 소중하게 품에 안고 다니더라. 큰 태풍으로 피해를 입은 소년이었는데 자신의 꿈이 담긴 그림을 소중히 여기는 모습에 감동했고 내 안의 분노가 그때부터 사라졌다. 아직 세상을 볼 수 있고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자는 마음이 커졌다. 덕분에 이후로도 미술 선교를 계속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필리핀, 남아공, 베트남, 네팔, 우간다, 캄보디아 여섯 개국을 방문했고 30개국을 채우는 게 목표다.”
-토끼를 그리게 된 계기는?
“어릴 때부터 그림과 만화를 좋아해 한국애니메이션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청각장애 탓에 소통이 잘 안 돼 중퇴했다. 일찍 세상에 나왔는데 장애인을 원하는 곳이 없더라. 그때 잠시 그림 그리는 일을 그만두고 한동안 방황했지만 아무리 헤매도 결국 가장 잘하고 좋아하는 활동이었던 그림으로 돌아오게 됐다. 방황을 끝내고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동화작가를 꿈꾸게 됐다. 학원에 등록했고 캐릭터 수업에서 동물백과사전을 보게 됐다. ‘동물 중 가장 청력이 뛰어나다’는 토끼에게 마음이 움직였다. 그렇게 베니가 만들어졌다. 2008년 3월에 싸이월드 스킨용으로 베니를 그려 세상에 처음 선보였다. 그때부터 인지도가 조금씩 쌓였고 2015년에는 베니 일러스트가 담긴 에세이 ‘그래도 괜찮은 하루’를 출판할 수 있었다. 이후 화장품, 호텔 등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하고 책도 꾸준히 출간하며 다방면으로 활동을 이어가는 중이다.”
-요즘은 어떤 작업을 하고 있나?
“2015년도에 출판한 에세이 ‘그래도 괜찮은 하루’ 재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그림체나 마음가짐이 예전과 많이 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다시 그리게 됐다. 전래동화 그림을 그리는 작업도 하고 있고 인스타툰으로 한국희귀·난치성질환연합회 환우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사연자의 질환, 그들의 이야기를 공부하고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는 작업이다. 환우와 가족을 넘어 일반인들의 마음에도 위로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제작하고 있다. 내년 즈음 ‘베니와 친구들’ 동화책 제작 예정이라 그 준비도 하는 중이다. 예전에는 눈이 아파도 수작업을 고집했지만 시야가 좁아지면서 버거워져 지금은 디지털 작업으로 전환해 편하게 그리고 있다.”
“2015년도에 출판한 에세이 ‘그래도 괜찮은 하루’ 재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그림체나 마음가짐이 예전과 많이 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다시 그리게 됐다. 전래동화 그림을 그리는 작업도 하고 있고 인스타툰으로 한국희귀·난치성질환연합회 환우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사연자의 질환, 그들의 이야기를 공부하고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는 작업이다. 환우와 가족을 넘어 일반인들의 마음에도 위로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제작하고 있다. 내년 즈음 ‘베니와 친구들’ 동화책 제작 예정이라 그 준비도 하는 중이다. 예전에는 눈이 아파도 수작업을 고집했지만 시야가 좁아지면서 버거워져 지금은 디지털 작업으로 전환해 편하게 그리고 있다.”
-희귀·난치성 질환 환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하루는 작은 인생이다’라는 쇼펜하우어의 말을 정말 좋아한다. 매일 다른 하루들이 모여 인생이 된다. 어셔증후군을 진단받은 뒤, 실명되기 전 꼭 해보고 싶은 일들을 버킷리스트로 적었다. 소박한 목표들이었지만 하나씩 실천해가는 일이 매일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됐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당신의 삶도 하루하루가 모여 완성되는 소중한 순간이다. 스스로를 짐처럼 여기지 말라고도 꼭 말해주고 싶다. 가족, 친구들에게 당신 존재 자체가 기쁨이고 행복이다. 미안해하기보다 더 사랑하고 함께 행복을 느껴라.”
☞어셔증후군이란?
청각과 시각을 상실하는 난치성 유전질환으로 국내 약 8000명의 환자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부모로부터 유전적 돌연변이를 물려받았을 때 나타나며 아직 근본적인 치료법이 없다. 진행 속도와 증상 중증도는 개인마다 다르지만 대부분 시간이 지날수록 청력과 시력을 점차 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