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일반

말하기 힘든 상실, “기억하고, 그리며 작별하세요”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줍니다.[아미랑]

김태은 드림(서울여자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암이 예술을 만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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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은 교수의 작품
우리는 삶을 살아가며 크고 작은 상실을 반복적으로 경험합니다.

일반적으로 ‘애도’라고 하면, 누군가를 잃은 뒤 겪는 깊은 슬픔과 그 회복 과정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다양한 상실들(이루지 못한 꿈, 포기하게 된 계획, 잃어버린 가능성) 그리고 그 상실 앞에서 필요한 작은 애도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정신분석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 Freud)는 ‘애도’를 사별 이후 정상적인 심리적 과정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영국 정신의학자 볼비, 심리학자 워든 등 애착이론과 상실이론을 발전시킨 학자들은, 죽음뿐 아니라 삶의 전환 속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상실들 역시 깊은 정서적 반응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현대 트라우마 이론에서도 인간이 경험하는 상실의 범위는 매우 넓고, 이에 따른 심리적 애도가 중요하다고 설명합니다.

암 진단 이후, 우리는 종종 예상치 못한 삶의 전환을 마주하게 됩니다.

예정되어 있던 여행, 기대하던 승진, 소중한 사람들과의 약속… 이 모든 것이 사라진 것은 아닐지라도, ‘내가 꿈꾸었던 삶’이 멈추거나 흔들릴 때, 우리는 어떤 정서적 공허함을 느끼게 됩니다. 사별처럼 누군가의 죽음을 겪은 상실은 아니지만 내가 꿈꾸었던 자신의 어떤 가능성을 상실한 순간이니 충분히 애도가 필요합니다.

이런 ‘작은 애도’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던 한 장면이 있습니다.

오래전 미술 치료 현장에서 만났던 초등학교 4학년 남자아이는 고열과 코피로 병원에 오게 되었고, 여러 차례 검사 끝에 골육종을 진단받았습니다.

항상 축구 유니폼을 입고 병원에 오던 그는, 검사 과정에서도 씩씩했고, 훈련에 늦는다며 서둘렀습니다. 그에게 축구는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삶의 중심이자 목표였습니다. 하지만 암 진단과 동시에, 훈련도, 경기장도, 그의 꿈도 멈춰 섰습니다. 진단 이후 그는 분노와 당황스러움 속에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나는 이제 축구선수가 못 되는 거냐”며 베개를 주먹으로 치던 그 모습은, 단지 한 아이의 감정 폭발이 아닌, 깊은 애도의 표현으로 보였습니다. 부모님은 치료에 집중해야 한다며 ‘지금 축구 이야기를 하는 건 철없는 짓’이라 여겼지만, 그 아이에게는 자신이 품었던 꿈을 제대로 보내줄 시간이, 말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저는 아이가 하고 싶은 만큼 축구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격려했습니다. 박지성 선수의 사진을 오려 붙이고, 기술들을 스케치북에 정리하고, 팀플레이와 전략에 관해 이야기하며 함께 작업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아이는 자신의 상실을 정면으로 마주했고, 때론 눈물 흘렸지만, 그 감정들을 하나씩 풀어낼 수 있었습니다. 이 시간은 항암 과정에서 정서적 지지를 만들어주는 중요한 기반이 됐습니다.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과 그것을 억누른 채 살아갈 때, 삶의 생기와 연결감은 점차 줄어들 수 있습니다. 그 아쉬움과 슬픔, 그리고 분노라는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정서적으로 인정하며, 작은 의식을 통해 표현하고 달래주는 일 그것이 바로 회복을 위한 출발점입니다.

슬픔과 상실에 대해 연구한 토마스 아티그는 “애도는 잃은 것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다시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말했습니다. 애도는 단순히 상실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실 이후의 삶을 다시 의미 있게 살아내려는 능동적인 움직임입니다.

위의 사례처럼 아이들은 다행스럽게도 자신이 아쉬운 것, 속상한 것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성인들은 ‘지금은 버텨야 할 때’라며 감정을 억누르고, 상실감을 다루지 않은 채 치료에만 집중하려 합니다.

그럴 때 저는 조용히, 함께 그림을 그려보자고 제안합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상실 앞에서, 그림은 기억하고, 그리워하고, 작별하며, 그럼에도 다시 살아갈 힘을 줍니다.

미술은 말을 대신해 우리 안의 아쉬움을 꺼내줍니다.
그리고 그것을 나만의 방식으로 보내주는 시간, 그것이 바로 ‘작은 애도’의 시작입니다.

슬픔을 묻어두지 마세요. 슬픔을 표현하세요. 그리고 다시 살아가야 합니다.
멈추지 않고 흐르는 물처럼, 우리는 상실을 안고도 그 너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림 한 장으로 시작하는 작은 애도는, 다시 살아가는 길을 만드는 용기의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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