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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편하게 할수록 얻는 것이 없다?

최훈 한림대 심리학과 교수

최훈의 이것도 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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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클립아트코리아 제공
2020년대 대한민국 대학 강의실에는 없는 것, 바로 교과서다. 언젠가부터 대학생들은 수업 교과서를 사지 않는다. 출판사에서 일하는 이들도 대학 교재가 팔리지 않는다며 하소연이다. “어떻게 학생이 수업 교재를 사지 않을 수 있어”라는 꼰대 식 말은 하지 않으려 한다. 어찌보면 수업에 교과서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선입견일 수 있으니.

내가 운영하는 수업 중에서도 몇 개 과목은 교과서 자체가 없다. 급격하게 변화하고 분화되는 현대 사회에서 내가 원하는 내용을 다룬 교과서를 찾기란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교과서가 없는 부분을 채우는 것은 일명 PPT라고 불리는 수업 자료들이다. 대부분의 교수들은 미학적인 측면에서는 부족함이 떨어질지라도 나름 열심히 PPT를 만들어서 학생들에게 배포하고, 학생들은 태블릿 PC에 그것을 담아 수업에 참여한다. IT 시대인 요즘의 트렌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여기서 고민되는 문제가 있다. 정말로 이렇게 수업자료인 PPT를 학생들에게 배포하는 것이 교육적으로 옳은 것인가하는 문제이다. 물론 학생들은 PPT 자료 배포를 선호한다. 당연할 수 있다. 일단 수업자료가 있으면 기본적인 내용은 필기할 필요가 없으니 편하기 마련.


그러면서 심리학을 전공하는 학생으로서 슬그머니 이론적 근거를 들이민다. 크게 두 가지인데, 첫째는 멀티태스킹(multi-tasking)의 어려움이다. 인간의 뇌는 기본적으로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주의(attention)와 관련된 영역에서 특히 그렇다. 그래서 뇌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멀티태스킹에 매우 취약하다. 심지어 어떤 연구자들은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멀티태스킹은 없으며, 지속적으로 두 가지 일을 번갈아 하는 것뿐인데 이렇게 하는 일을 바꾸면 바꿀 때마다 ‘과제 전환 비용(task-switch cost)’이 발생하기 때문에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것이 좋다고 이야기한다. 학생들도 수업자료를 주지 않으면 필기하는 내용이 많아져서 수업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이야기한다. 즉, 필기하는 작업과 수업 내용을 이해하는 작업, 두 작업을 동시에 하는 멀티태스킹이 어려우니 수업자료를 배포하는 것이 수업에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말이 된다. 물론 학생들이 수업 시간 내내 책상에 올려놓은 핸드폰의 존재 자체도 멀티태스킹을 야기해 주의 집중을 방해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싶지만, 굳이 논의 초점을 벗어날 필요는 없을 테니.

두 번째는 수업 시간에 보여주는 것과 똑같은 수업 자료에 필기를 하면, 나중에  수업 내용이 더 잘 떠오른다는 것이다. ‘부호화 특수성 원리(encoding-specificity principle)’에 따르면 내 머릿 속 정보는 기억에 입력될 때와 똑같은 상황·환경에서 더 잘 생각난다. 그러니 수업 시간에 보여주었던 것과 똑같은 자료를 가지고 있으면 시험공부를 할 때 더 잘 기억난다는 것이다. 사실 이 말도 맞다. 근거 없는 주장들이 아니니 그냥 기쁜 마음으로 수업자료를 주면 좋을 것 같다(실제 그러고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노 페인 노 게인(no pain, no gain)’의 원칙이 나를 주저하게 한다.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는 말은 요즘 피트니스 클럽 코치들이 즐겨 쓰는 말이다. 근육이 찢어지는 고통이 있어야 탄탄한 근육이 가능하다며 ‘마지막 2개 더’를 외칠 때 쓰는 말. 그런데 이 말이 우리의 뇌에도 적용된다. 정보가 내 머리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처리를 깊게 하면 할수록 나중에 더 잘 떠오른다. 능동적으로 깊게 처리하면 할수록 수동적으로 얕게 처리하는 경우보다 더 많은 흔적을 남기게 돼 기억이 더 잘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영어 단어 리스트를 보고 그 단어가 대문자인지 소문자인지를 판단하게 하는 비교적 단순하고 얕은 처리를 요구했을 때보다, 그 단어의 의미를 판단하게 하는 비교적 깊은 처리를 하도록 했을 때 단어에 대한 기억력이 더 좋다. 뇌도 고통(?)을 줘야 더 잘 작동하는 셈이다. 실제로도 수업자료를 배포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에서 어느 쪽이 수업 내용을 더 잘 기억하는지를 비교했더니, 배포하지 않고 학생 스스로 내용을 이해하고 필기하도록 유도하는 쪽이 수업 내용을 잘 기억했다는 연구들도 있다.

공부를 편하게 하면 할수록(더 정확하게는 뇌를 편안하게 하면 할수록) 얻는 것은 없다. 인지심리와 뇌를 공부하는 학자로서, 또 태어나서 공부 외에 다른 직업을 가져 본 적이 없는 사람으로서 내린 결론이다. 그래서 학생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교육을 위해 굳게 다짐하며 수업자료를 주지 않아야 할 것 같다고 공지하는 순간, 학생들의 처절한 외침이 들린다. “교수님, 수업자료를 주셔도 교수님의 수업 내용은 이미 충분히 저희 뇌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뭔가 설득이 된다. 음…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하기에는 너희들 지난 중간고사 점수가 너무 낮았던 거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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