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동반자살? ‘자녀 살해 후 자살’은 명백한 살인”
전종보 기자
입력 2023/04/13 19:10
[우리, 살자]⑥ 영문도 모른 채 죽는 아이들
자녀 살해 후 자살에 대한 인식 개선이 시급하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자녀가 의지와 상관없이 부모에 의해 살해당하는 것은 동반자살이 아닌 명백한 살인이자 아동 학대 행위로, 이를 막기 위한 대책 마련과 사회적 관심이 절실하다는 설명이다.
◇아동학대 사망 3건 중 1건, 살해 후 자살… “의지와 무관한 죽음”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백종우 교수는 지난 12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자녀 살해 후 자살 대응 국제 심포지엄: 개인의 비극 너머 대안을 묻다’에서 이 같이 밝혔다. 자녀 살해 후 자살이란 정신과적 질환이나 경제적 문제, 가족 간 갈등 등 여러 원인으로 인해 부모가 자녀를 살해한 뒤 자신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뜻한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국내 자녀 살해 후 자살로 인한 아동 사망은 2018년 7건에서 2019년 9건, 2020년 12건, 2021년 14건으로 계속해서 증가했다. 지난해 전체 아동학대 사망(40명) 중 35%가 살해 후 자살로 인한 사망이었다. 이날 ‘국내 자녀 살해 후 자살 대응 개선방향’을 주제로 기조강연을 진행한 백종우 교수는 “자녀 살해 후 자살은 동반자살과 구분되는 소중한 생명과 관련된 문제”라며 “한국 사회의 산업화·핵가족화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의 가장 극단적 형태로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매우 복합적 원인이 작용하며, 자녀의 의사와는 무관한 결정”이라며 “자녀의 동의를 구하지 않거나 자녀가 너무 어려 동의할 능력 자체가 없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인식 개선·조기 대응 필요… “정확한 현황 파악해야” 지적도
자녀 살해 후 자살을 막기 위해서는 인식 개선과 함께 자녀 돌봄 문제를 가족 내부가 아닌 사회적 문제로 보고, 위기 가족을 조기 발견·대응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이어진 1부 토론에서 백 교수는 “현재와 같은 가족 중심 구조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며 “국가적 차원에서 찾아가는 서비스나 정기적인 우울증 검진 등을 통해 그들을 조기에 발견하고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찰청 강력범죄수사과 임인수 계장 또한 “자녀 살해 후 자살은 1건만 발생해도 사회적 충격이 큰 사건”이라며 “자녀 살해 후 자살은 동반자살이 아닌 명백한 범죄라는 인식과 함께, 자녀가 혼자라도 살아갈 수 있다는 사회적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심리부검을 통한 자살자 특성 파악과 함께 사회적 안전망·치료 접근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보건복지부 자살예방정책과 이두리 과장은 “자녀 살해 후 자살을 막기 위해서는 과학적 접근을 통한 자살자 심리부검으로 자살자 특성을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며 “동시에 부모의 여러 문제가 자살 선택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사회적 개입을 통해 안전망을 강화하고, 정신건강의학과 검진·치료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도 요구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정확한 전수조사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아직까지 부모가 자녀를 살해하는 비속 살해에 대한 공식적 통계가 없어, 자녀 살해 후 자살로 목숨을 잃는 아동의 정확한 현황이 파악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파악된 건수보다 알려지지 않은 피해 건수가 더 많을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백종우 교수는 “현재 상황을 정확히 알아야 제도를 개선하고 대응할 수 있다”며 “제대로 된 전수조사를 통한 교육과 인식개선, 법제도화, 의료 복지 공백을 메꾸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독일, 10~20년 전부터 전수 조사·법 개정… “실질적 예방책 마련 절실”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독일, 일본, 캐나다 등 해외 현황·대응 사례 발표와 함께 구체적인 예방책에 대한 각계각층의 논의도 이뤄졌다. 독일 함부르크 경찰응용과학대학교 형법학과 울리케 제커링 교수는 “독일의 경우 1997년부터 2012년까지 0~5세, 6~13세에 대한 모든 고의적 살인 사건을 분석하고, 이 중 자녀 살해 후 자살에 의한 사망이 차지하는 비중을 파악하는 등 오랜 기간 전수 조사를 실시했다”며 “지난 20년 간 문제 해결을 위해 관련 법 개정 또한 이뤄졌다”고 말했다. 일본의 경우 당국의 1차 조사 당시(2003년)에는 자녀 살해 후 자살 사례가 1건도 보고되지 않았으나 이후 8건, 30건, 65건으로 급증하기 시작했다. 전문가는 실제 사망 건수가 급증한 것이 아닌 인식 개선으로 인한 발견 건수가 증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본 아동학대방지연구센터 가와사키 후미히코 센터장은 “일본에서도 자녀 살해 후 자살 사례가 드물지 않지만, 사회적으로 크게 이슈가 되는 경우는 적은 편”이라며 “부모가 함께 숨질 경우 ‘죽은 사람을 비난할 수 없다’는 인식이 강한 점, 비난에 대한 우려로 사건이 보도되지 않는 점, 당사자의 사망으로 조사단서가 사라져 검증·분석이 어렵다는 점 등이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국내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또한 국내 자녀 살해 후 자살을 예방·대응하기 위해 정부와 학계, 민간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숭실대학교 사회복지학부 한우재 교수는 “‘오죽하면’과 같은 식의 온정주의적 시각을 지양하고, 적극적인 예방·대응과 위험요인 인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며 “관련 연구 역시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를 중심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세이브더칠드런 아동권리정책팀 강미정 팀장 또한 “일본 정부의 학대 사망 검증과 독일의 아동살인에 대한 10년 이상 전수 조사는 자녀 살해 후 자살 대응을 논의하는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며 “아이들의 죽음을 돌아보고 피해를 막을 수 있도록 실질적인 예방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