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가족 같은 환자들… 제가 잔소리해도 싫어하지 않아요"
김진구 헬스조선 기자 | 사진 신지호 헬스조선 기자
입력 2018/01/03 08:30
서울 창신동 정가정의원 정명관 원장
서울 종로구 창신동의 오래된 골목. 골목 한 편에 17년째 같은 자리를 지켜온 정가정의원이 있다. 기자가 의원을 찾은 날은 마침 영하 12도로 올 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이었다. 그럼에도 대기실에는 환자로 가득했다. 대부분이 병원을 다닌 지 10년 이상 된 단골 환자다. 감기 기운이 있어 병원을 찾았다는 홍순옥(73·가명·여)씨도 그중 하나다.
“다닌 지 오래 됐어요. 병원이 문 열 때부터 다녔으니까 벌써 17년째네요. 아프면 다른 데는 안 가고 무조건 여기로만 와요. 원장님이 잘해주시니까. 나뿐 아니라 우리 가족 전부 여기로만 다녀요.”
만성질환자가 병원 한 곳을 정해두고 다니면 단순히 편한 것 이상의 효과가 있다. 고혈압·당뇨병 등이 더 효과적으로 관리된다. 실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국내 고혈압 환자 752만 4271명을 조사했더니, 병원 한 곳을 정해두고 다니는 환자가 증세가 악화돼 병원에 입원할 확률은 인구 1만 명당 43.3명이었다. 반면, 여러 병원을 돌아다니며 고혈압을 관리한 환자의 입원율은 인구 1만 명당 69.5명이었다. 당뇨병도 마찬가지. 병원 한 곳에서 꾸준히 진료 받은 당뇨병 환자의 입원율은 인구 1만 명당 243.1명인 데 비해, 여러 병원을 돌아다니며 진료 받은 환자의 입원율은 459.7명으로 두 배 가까이 높았다.
왜 이렇게 차이가 큰 걸까. 그 이유는 복약순응도에 있다. 복약순응도란, 약을 처방받고 꾸준히 복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 같은 조사에서 병원 한 곳만 다니는 고혈압 환자의 복약순응도는 83.9%인 데 비해, 여러 곳을 다니는 고혈압 환자의 복약순응도는 52.4%에 그쳤다.
당뇨병 역시 98.5% 대 73.8%로 차이가 컸다. 단골병원을 다닐 때 복약순응도가 높은 이유로 정명관 원장은 ‘환자와 쌓은 신뢰감’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환자마다 잘 맞는 약이 있고 맞지 않는 약이 있습니다. 경험하는 부작용도 다르죠. 병원이 바뀌면 처방이 바뀌고 약이 바뀌어서 환자가 경험하는 약의 효과와 부작용까지 바뀝니다. 이는 복약순응도를 떨어뜨리는 큰 이유입니다.”
한 병원을 계속 다니면 환자에게 또 어떤 이익이 더 있을까?
“의사가 환자의 상태를 매우 잘 파악하고 있죠. 무슨 약이 효과가 있는지, 무슨 부작용이 있는지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 수 있습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재빨리 대처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죠.”
그러나 같은 단골의원이라도 차이는 있게 마련. 그 중에서도 어느 의원이 고혈압·당뇨병을 잘 보는지가 궁금하다. 이와 관련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매년 ‘고혈압·당뇨병 적정성평가’ 결과를 바탕으로 ‘진료 잘하는 병원’을 선정한다. 올해 역시 전국에 개설된 의원급 의료기관 2만 9928곳을 대상으로 평가가 진행됐다. 그 결과, 전체의 6.3%인 1884곳이 진료 잘하는 병원으로 선정됐다.
서울에서는 371곳이 선정됐는데, 정가정의원도 그 중 하나다. 2015년 평가가 시작됐을 때부터 3회 연속으로 선정됐다. 어떤 비결이 있는 걸까. 정명관 원장은 ‘기본에 충실한 덕분’이라고 말했다.
“기계적으로 고혈압약을 먹으면 혈압이, 당뇨병약을 먹으면 혈당이 떨어지면 좋겠지만, 고혈압·당뇨병은 변수가 매우 다양해서 관리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가이드라인이 매우 구체적으로 정리돼 있죠. 이 가이드라인에 충실하면 환자는 웬만해선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를 실천하기는 여간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항목이 의사가 번거롭고 불편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죠. 심평원의 ‘진료 잘하는 병원’이 전체의 6.3%에 그치는 결과는 기본을 지키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환자를 더욱 효과적으로 돌보려면 잔소리도 필수다. 임양례(83·가명·여)씨는 무릎 관절염으로 두어 달에 한 번씩 정가정의원을 방문한다. 오랜만에 병원을 찾은 임씨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어제 200포기나 김장을 했다고 말했다. 점잖게 듣던 정 원장이 잔소리를 시작했다.
“무릎 아프신 분이 쪼그려 앉아서 김장을 하면 어떻게 해요. 말씀드렸잖아요. 무릎 관절염 환자한테는 쪼그려 앉는 거랑 바닥 걸레질 하는 게 안 좋다고요. 앞으로는 앉아서 일하더라도 다리를 쭉 펴고 일하셔야 합니다.”
잔소리를 들었지만 임 할머니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 오히려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의사님 만나려고 여기 오지, 다른 데는 가고 싶지도 않아. 10년째 다니고 있어. 우리 식구는 전부 여기로 와.”
가까이서 관찰한 정명관 원장의 진짜 장점은 바로 이런 점이다. 한 자리에서 20년 가까이 환자를 돌보다보니 가족처럼 환자를 속속 알고 있다. 그만큼 환자와의 신뢰감도 높다.
“환자의 신뢰감이 높아진 상태여야 의사가 하는 이런저런 조언을 잔소리로 생각하지 않고 듣게 되죠. 짜게 먹지 마라, 운동해라 같은 뻔한 말을 잘 전달해야 합니다. 환자의 성격은 어떤지, 상태는 어떤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알면 거기에 맞춰서 더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있다. 환자가 밀리다보니 환자를 보는 시간이 너무 짧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족하나마 묘안을 짜냈다. 반드시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가급적 병원을 방문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 역시 그가 말한‘기본’에 해당한다. 불필요한 병원 방문이 없다보니 환자 입장에서 불편과 부담이 크게 줄어든다. 병원 입장에서는 수익이 줄어들지만, 당장의 수익보다는 환자들과의 신뢰가 중요하다는 것이 정 원장의 설명이다.
“고혈압·당뇨병 같은 만성질환은 두세 달에 한 번 꾸준히 보고, 단순 감기 같은 급성기질환은 되도록 적게 보고 있습니다. 환자를 두 번, 세 번 오게 하면 병원 수익에 도움은 되겠지만 감기의 경우 병원에 자주 온다고 낫는 질환도 아닐뿐더러 환자만 불편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네의원이야말로 한국 의료의 근간이다. 정 원장처럼 묵묵히 뿌리를 지탱하는 의사가 많아질수록 우리나라가 더욱 건강해진다. 기본을 지키며 창신동 주민을 어루만지는 그의 잔소리가 오래도록 함께 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