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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스조선 7월호 게재 기사]이건희 삼성 회장의 ‘저체온 요법’, 뇌손상 어떻게 막나 보니…
취재 : 이동혁 기자 | 도움말 : 김광택(고대안암병원 냉동수술센터장), 이성우(고대안암병원 응급의학과 교수), 한문구(분당서울대병원 뇌졸중센터 교수)
입력 2014/07/18 15:15
요즘 뜨는 저체온 요법의 모든 것
사람을 ‘얼려서’ 살린다. 최근 국내외에서 저체온 치료가 화제의 중심이 됐다. 국내에선 이건희 삼성 회장이 급성심근경색 회복을 위해 저체온 치료를 받았고, 미국에서는 외상 환자의 체온을 섭씨 10도까지 떨어뜨리고 수술하는 계획이 발표돼 외신을 탔다. 이런 치료법이 발전하면 공상과학영화에서나 보던, 불치병 치료를 위해 환자를 냉동시켜 보관하는 기적의 의술이 가능해질까?
SF영화 속 ‘불치병 환자 냉동보존’은 불가능
아쉽지만, 냉동상태로 잠들었다가 수백년 후 깨어나 불치병을 치료받는 영화 속 장면은 의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현실화할 수 없다. 인체 세포는 극저온에서 극심한 손상을 입는다. 갑자기 온도가 내려가면, 세포는 동파(凍破)한다. 가장 먼저 세포 주위의 수분이 얼면서 세포는 심한 탈수 상태에 빠진다. 탈수 상태가 되면 세포의 단백물질과 구조가 파괴된다. 세포 내부도 얼면서 효소와 구조가 파괴된다. 또 세포 내부에 생긴 얼음 결정은 세포막을 파괴시킨다. 인체의 최소 구성단위인 세포가 이처럼 안팎으로 모두 파괴되기 때문에 사람은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따라서, 영화 속 냉동인간 보존법을 현실화시키려면 세포 안팎의 수분이 얼어붙지 않게 관리해야 하는데, 이는 체온을 영하로 내려놓으면 불가능하다. ‘불치병 환자 냉동보존’은 신체가 얼어야 부패하지 않는다는 개념에서 출발한다. 영상 상태에서는 생명 활동을 중단시킨 신체가 부패하거나 미라처럼 건조되는 것을 피하면서 원상태로 보존할 길이 없다. 공상과학 속의 불치병 치료 판타지가 실현되려면, 미래의 과학자들이 ‘냉동보존법’ 대신 ‘얼리지 않고 보존하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현실 속의 냉동치료는 19세기에 이미 시작
하지만, 불치병을 몇 백년 후에 못 고친다고 실망하지는 말자. 이러한 냉동 세포파괴 과정을 응용한 냉동치료가 오늘 현실의 진료실에서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냉동치료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 됐다. 이미 1850년대 영국에서 암 환자의 통증. 부종 감소법으로 처음 개발됐고, 이어 미국과 프랑스 등지에서 피부과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초기에는 사마귀나 얼굴의 검은 점을 빼는 미용 목적으로 쓰다가, 외과에 도입돼 치질 수술에 적용됐다. 요즘은 암 수술에 주로 쓴다. 냉동 암수술법은 이렇다. 직경 1.5mm 미세 치료침을 초음파 내시경을 이용해 암세포에 가져다 대고, 아르곤과 헬륨 가스를 분출해 치료침 끝부분의 온도를 영하 180도까지 떨어뜨린다. 이 침으로 암세포 및 주변 혈관을 영하 90도 이하로 급히 얼렸다가 녹이면서 괴사시킨다. 피부암에 쓰다가 요즘은 몸 안 장기에 생기는 암에도 적용한다. 국내에선 냉동수술센터가 있는 대학병원을 중심으로 전립선암.폐암.간암.신장암.대장암.골수암 등에 두루 쓴다.
냉동 암수술은 치료 안정성과 초기 결과는 우수하지만, 임상에 적용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어서 장기적인 치료 효과는 아직 모른다. CT(컴퓨터단층촬영)나 MRI(자기공명영상) 등 영상검사에 나타나는 암은 파괴할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 미세한 암조직은 없애지 못하는 한계도 있다.
이건희 회장 저체온 요법은 2002년 개발돼
이처럼 국소 부위의 종양을 얼려 죽이는 냉동수술 외에, 급성 심정지 환자의 뇌손상 방지 등을 위해 전신 체온을 떨어뜨리는 저체온 요법이 있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급성심근경색 발병 후 받아서 유명해진 치료법이다. 이 치료법이 등장한 건 오래되지 않는다. 2002년 세계적인 의학 학술지 뉴잉글랜드의학저널(NEJM)에 '심정지 환자의 뇌손상 방지에 저체온 요법이 효과 있다'는 논문 2편이 실리면서부터다. 저체온 요법은 이 논문 이후 세계 의료계에 퍼졌다. 국내에도 빠르게 도입됐고, 이미 큰 종합병원을 위주로 냉동수술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시술되고 있다.
미국심장학회와 유럽심폐소생술위원회는 저체온 요법을 ‘심정지 후 혼수상태로 있는 선택된 환자에게 사용하라’고 권고한다. 쉬운 말로 풀면, ‘급성심근경색 등으로 심장이 멎어서 혈액 흐름이 중단됐던 환자 중, 적절한 치료를 받아서 심장은 다시 뛰기 시작했지만 의식은 아직 혼수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쓰라는 것이다. 이건희 회장이 이 케이스에 해당한다.
저체온이 뇌손상 치료하는 기전은 정확히 몰라
사람의 뇌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려면 혈액이 아주 많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심장이 마비돼서 혈액을 뿜어내지 못하게 되고 불과 5분이 지나면 뇌세포는 망가지기 시작한다. 이 상태에서 심장이 다시 뛰게 되면 갑자기 다량의 혈액이 뇌에 쏟아져 들어가는데, 그러면 오히려 뇌세포는 더 심하게 망가진다. 이 때 체온을 32~34도까지 하락시키면 온몸의 신진대사가 늦춰져서 이런 문제가 덜 생긴다. 체온을 낮추기 위해서는 환자를 냉각매트에 눕히고 혈관에 섭씨 4도의 생리식염수를 체중 1kg당 30mL씩 주입한다. 특수냉각관을 혈관에 삽입하기도 한다.
저체온 요법은 심정지 후 뇌손상 치료에 효과가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인정된다. 그런데, 막상 사람의 체온을 낮추면 왜 뇌손상이 줄어드는지는 현대의학도 100% 정확한 메카니즘을 모른다. 전문의들도 뇌손상을 유발하는 신경전달물질을 억제하고 뇌장벽을 보호하며, 뇌압을 떨어뜨리는 등의 작용을 통해 뇌손상을 억제한다고 추정하는 정도이다. 어쨌든 임상에서 관찰되는 효과는 분명해서, 2010년 미국심장학회의 심폐소생술 가이드에 공식 포함됐다.
국내에선 물에 빠졌다가 저절로 저체온 치료를 받은 셈이 된 운 좋은 남성이 있다. 지난해 초봄 강원도 춘천 소양호에서 젊은 남성이 얼음이 녹기 시작한 줄 모르고 얼음장에 올라갔다가 물에 빠졌다. 이 남성은 물속에서 얼음판을 붙잡고 덜덜 떨다가 의식을 잃고 50분만에 구조됐지만 심장마비 상태였다. 근처 대학병원에서 심폐소생술을 받은 이 남성은 정상적으로 건강을 되찾고 퇴원했다. 이 남성이 심장마비가 왔는데도 뇌손상 없이 회복된 것은 차가운 물 속에서 자연스럽게 저체온 상태가 유지됐기 때문이다.
미국선 체온 10도 ‘초저체온 수술’ 계획중
저체온 요법은 심정지 외에 중증 외상성 뇌손상, 뇌졸중, 간기능부전, 척수손상 등에도 쓸 수 있다. 최근 외신은 미국 피츠버그대학병원이 시도하고 있는 중증 외상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초(超)저체온’ 응급 수술법을 보도했다. 출혈이 많은 환자가 실려오면, 의료진은 환자의 혈관에 차가운 생리식염수를 주입해서 체온을 10도까지 떨어뜨린다. 체온을 32~34도 이하로 떨어뜨리지 않는 일반 저체온 요법과 비교하면, 조금 과장해서 ‘냉동인간 수술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체온이 10도까지 떨어지면 환자는 생명을 유지하는 생리작용을 모두 멈추는 ‘가사(假死) 상태’가 된다. 사실상‘일시적으로 얼어죽었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의료진은 환자가 가사 상태에 빠진 동안 1시간 정도를 뇌손상 걱정 없이 급한 외상 수술에 쓴다. 정상 체온에선 5분이면 뇌손상이 시작된다. 수술을 마친 의료진은 몸 안의 혈관을 돌던 차가와진 혈액을 인공심폐기로 꺼내서 따뜻하게 데운 뒤 다시 몸 안에 넣어 준다.
이 수술법은 현재 동물실험을 거친 단계로, 사람에 대한 안전성은 확인되지 않는 ‘초기 임상시험’ 수준의 시도이다. 초저체온 수술 중 환자가 사망할 우려가 적지 않으며, 수술이 잘 돼 생명을 유지해도 체온이 30도 이하로 떨어질 경우 나타나는 부정맥.고혈당증.혈액응고장애 등의 심각한 합병증을 피해야 하는 과제도 안고 있다. 피츠버그대학병원은 실제 환자가 발생하면 10명 정도 시술해 볼 예정이다.
한국은 '심정지 저체온 치료법'이 더 도움돼
피츠버그대학병원의 초저체온 응급수술은 한국보다는 총기 사고가 많은 미국 상황에 필요한 의술이다. 이 병원은 "이 수술법은 총을 맞고 심각한 출혈 상태에서 응급실에 오는 흑인 환자가 많은 피츠버그 지역 상황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우리나라는 과다 출혈로 병원에 들이닥치는 응급환자는 상대적으로 적다. 반면, 심폐소생술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자동심장제세동기도 충분히 보급돼 있지 않아, 심정지 상태에서 응급실에 실려오는 급성심근경색 환자가 훨씬 많다. 이런 실태를 감안하면, 피츠버그대학병원 방식의 초저체온 수술보다는 심정지 후 뇌손상 방지를 위한 일반적인 저체온 치료법이 더 많은 의료기관에 도입돼야 한다.
월간헬스조선 7월호(122페이지)에 실린 기사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