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정음 같은 상큼발랄한 머리 색깔을 꿈꾸며 셀프염색을 하고 난 뒤 하루가 지난 다음날이었다. 두피가 화끈화끈, 뒷목덜미가 붉게 부풀어 오르면서 가려움증과 따가움증으로 반 미쳐갈 때쯤 기자는, ‘아… 설명서는 폼으로 주는 게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 기자는 봄을 맞이하는 여성의 본능에 충실하기 위해 흑단같은 검은 머리카락을 몇 년 만에 염색하기로 마음먹고, 미리 사 둔 신상 염색약을 화창한 일요일 아침에 집어들었다.
“언니는 염색할 때마다 형부가 직접 해 준다더라.” 아침 댓바람부터 자는 남편을 깨워 약 발라달라고 졸랐지만, 남편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잠에 취해 있었다. 금요일 아침에 감은 머리가 근질거리기도 했거니와, 외출하기 전 눈부신 갈색으로 변신하고 거리를 나설 생각에 남편의 도움없이 혼자 하기로 마음먹었다.
설명서에 깨알같은 글씨로 적혀있는 ‘패치테스트’ 따위는 무시해버렸다. 순간 5년 전쯤, 헤나염색약으로 집에서 염색할 때 가려움증 때문에 귀를 미친듯이 긁다가 하마터면 닳아 없어질 뻔했던 일이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이 어느 때인가! 염모제 시장에도 바야흐로 천연의 바람이 불고 있지 않던가! ‘No암모니아’, ‘저자극’, ‘000성분(천연성분)’ 등의 포장지에 적힌 문구가 나를 안심시켜주었다.
그렇게 염색약을 추적추적 바르고 나니 크림 타입이라 그런지 흘러내리지도 않아 집도 치우고 밥도 할 수 있었다. 내장되어 있던 목에 두르는 비닐은 거추장스러워서 일찌감치 치워버렸다.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다음날 목 주위에는 시뻘건 발진이 철쭉 화단처럼 돋아있었다. 날짜가 지날수록 가라앉기는 커녕 점점 더 심해지고 발진 부위도 귓바퀴에서 목덜미까지로 확대됐다. 가려워서 긁을수록 더 긁고 싶어졌고, 업무 집중도도 현저하게 떨어졌다.
알고보니 이와 같은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성분은 PPD(Para Phenylene Diamine, 파라페닐렌디아민)로 영국의학저널에 실린 보고에 따르면 이 성분이 일으키는 부작용 때문에 얼굴이 부어오르고 동통성 타박상이 생겨 병원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염색약은 성분에 따라 식물성, 금속성, 식물금속 혼합성, 유기합성 염색제 등으로 구분되는데, 국내에서 주로 시판되는 염색제는 유기합성 염색제다. 이와 같은 화학 염색제에는 수십여 가지의 화학물질이 들어가는데, 파라페닐렌디아민은 특히 접촉성 알레르기를 일으킬 위험이 높아 농도 상한이 6.0%로 규정돼 있다. 대부분의 염색약이 이 기준에 부합되고는 있으나 워낙 독한 녀석이라 알레르기를 잘 일으킨다.
실제로 한국소비자원에 전화해서 확인해 보니 작년(2009년)의 경우 염색약 부작용으로 인한 피해접수 건수가 129건이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는 환불을 요구한 경우도 있었지만, 치료비 배상 문제를 접수한 건수도 상당수였다. 제조사의 고객센터로 전화했더니 치료비 영수증과 제품구입 영수증을 보내주면 바로 치료비 배상과 다른 제품으로 교환이 가능하다고 상담원이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증상이 심해지니 빨리 병원을 가보라"는 조언도 덧붙였다.
목요일까지 약도 바르지 않고 버티다가(사실은 병원 갈 시간이 없어서) ‘내일도 심해지면 병원에 가봐야지’하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금요일 아침이 되니 가려움증이 덜해졌다. 임이석 테마피부과 원장은 “병원에 와서 순한 스테로이드 제제 연고를 처방받아 바르거나 항히스타민제를 복용하면 고생을 덜했을 텐데…”라며 “병원에 갈 여건이 되지 않을 경우 목덜미 등 해당 부위를 시원하게 해 주고, 깨끗하게 해 주면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이 모든 대가를 치루고 그래서 황정음 머리가 됐냐고? 천만에! 내가 가지고 있던 염색약은 분명히 컬러명으로는 ‘자연갈색’이었지만 ‘새치머리용’이라는 부제가 붙어있었던 것! 새치머리용으로 나온 염색약 컬러들은 아무리 ‘갈색’이라고 돼 있어도 ‘흑색’과 대동소이하다는 사실을 나는 염색 후에 알았다.
결국 내 새치들만 회춘했을 뿐, 동료들은 아무도 염색했는지 알아보지 못했다. 며칠 동안 내가 들은 말이라곤 “이기자, 이 있어? 왜 자꾸 머리를 긁어? 비듬 떨어져!” 라는 타박 뿐이었다. ‘봄도 됐는데, 염색이나 해 볼까’하는 여성 여러분! 아무리 귀찮더라도, 패치테스트는 꼭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