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뇨

5년치 약값들인 인슐린 펌프, 장롱 속에서 잠자는 이유?

정시욱 헬스조선 기자

8년째 당뇨병을 앓고 있는 김정순(66·가명)씨는 장롱 문을 열 때마다 속에서 열불이 난다. 4년 전 당뇨병 환자에게 인슐린을 자동으로 투여해주는 인슐린 펌프를 300만원이나 들여 구입했는데, 불과 몇 달만 쓰고 장롱 서랍 속에 넣어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 펌프만 차고 다니면 밥 먹기 전에 인슐린 주사를 맞지 않아도 저절로 알아서 혈당 관리가 된다는 언니의 말을 믿었다고 한다.

담당 의사는 "펌프 하나로 당뇨병이 낫는 것은 아니니 약물 치료를 더 해보자"고 했지만, 김씨는 펌프만 달면 당뇨병에서 해방될 것 같은 마음에 의사를 졸랐다는 것. 하지만 인슐린 펌프를 과신한 김씨는 식이조절과 운동을 게을리했고, 그러다 저혈당 쇼크로 응급실에 실려가기까지 했다. 김씨는 "지긋지긋한 당뇨병 관리가 힘들어 인슐린 펌프에 기댈 생각만 했다. 욕심 부리다가 5년치 약값을 펌프 사는 데 다 날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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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뇨병 환자가 인슐린 펌프를 착용한 모습 /헬스조선 DB

당뇨병 환자들의 혈당 관리를 도와주는 고가 인슐린 펌프의 상당수가 장롱 속에 잠자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추정한다. 의료계에 따르면 국내에서 시판된 인슐린 펌프는 약 10만대 정도. 이중 적게는 절반, 많게는 70~80%가 제대로 사용되지 않고 방치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한 대에 150만~400만원에 이르는 값비싼 의료기기인 인슐린 펌프가 이처럼 방치되고 있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사용법을 잘 모르거나 불편하기 때문이다. 특히 인슐린의 대표적 부작용인 체중 증가 때문에 펌프 사용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인슐린 펌프는 ▲인슐린을 지속적으로 정확하게 주입 ▲식사 조절의 편리함 ▲따끔한 주사바늘로부터 해방 ▲여행이나 활동이 편리하다는 것 등이 장점이다. 하지만 인슐린 펌프 사용자들은 목욕이나 샤워할 때 불편함을 많이 호소한다. 샤워할 땐 펌프를 샤워 팩에 넣고 주사 부위에는 방수용 테이프를 붙여야 하고, 물에 젖으면 헤어 드라이어 등으로 말려야 하기 때문이다.

인슐린을 지속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복부, 허벅지 등에 압정 모양의 주사 바늘을 하루 종일 꽂아 두는데, 이 부위가 멍이 들거나 피부 감염, 이물감 등을 느낄 수 있다.

인하대병원 당뇨내분비센터 김용성 교수는 "처음에는 인슐린 펌프를 잘 쓰다가도 얼마 뒤에 귀찮다는 이유로 떼버리는 사람이 많다. 인슐린 펌프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려면 병원에 4~5일간 입원해 인슐린 분비 패턴을 정확히 측정하고, 펌프 사용법도 제대로 익혀야 한다"고 말했다.

인슐린 펌프를 쓸 때는 주의해야 할 점이 많다. 갑자기 펌프 배터리나 인슐린이 떨어지거나 바늘이 막히면 1회용 주사기로 인슐린을 보충해주어야 한다. 아울러 최소 5일에 한번 주사기와 주입 세트를 교환하고, 하루 4회 이상 혈당 측정도 필수다.

둘째, 인슐린 펌프만 달면 당뇨병이 완치되는 것으로 알았다가 낭패를 보는 사례도 적지 않다. 펌프를 단 뒤 자가 혈당 측정이나 식사조절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다.

강북삼성병원 내분비내과 이은정 교수는 "인슐린 펌프를 달아도 하루 5~7번의 혈당체크, 식사 관리와 운동을 꾸준히 해야 하는데 펌프를 단 뒤 이를 게을리하는 환자가 많다"고 말했다. 인슐린 펌프를 단 뒤 관리 미숙 때문에 저혈당 쇼크로 병원 응급실을 찾는 사례도 적지 않다고 이 교수는 말했다. 펌프는 당뇨병을 관리하는 하나의 도구일 뿐인데도, 마치 완치된 것처럼 과신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셋째, 펌프를 달 필요가 없는 사람이 남의 말만 듣고 구입했다가 후회하는 사례도 있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인슐린 펌프가 당뇨병을 앓는 부모를 위한 '효도선물'로 알려져 약으로 충분히 조절 가능한 노인 당뇨병 환자들에게 인슐린 펌프를 달아달라고 의사에게 부탁하는 자녀들까지 있다.

당뇨병 환자 중에서 인슐린 펌프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가 많다. 의사마다 당뇨병 치료의 기준은 차이가 많으나, 일반적으로 ▲제1형 당뇨병(소아당뇨) ▲제2형 당뇨병 중 혈당 조절이 안 되는 경우 ▲임신성 당뇨병 ▲저혈당이 잦은 경우 ▲식사 조절이 어려운 경우 등에만 인슐린 펌프 착용을 권한다.

허내과의원 허갑범 원장은 "인슐린 펌프가 편하다고 과신했다가 약물치료로 되돌아가는 환자들이 꽤 있다. 당뇨병 치료의 기본은 인슐린 분비와 인슐린 저항성을 잘 평가해 환자의 특성에 맞는 맞춤형 치료를 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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