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6-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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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탄다.” 저는 이를 ‘가을이란 단어에 중독된 자기 최면 상태’라고 봅니다. 유난히 높고 맑은 하늘은 공허한 내 마음을 대신하는 것 같습니다. 다리에 힘이 빠지고 다시 달려갈 전투의욕도 사라집니다. 그저 달력이 몇 장 넘어갔을 뿐인데 이렇게 힘이 들다니. 허겁지겁 미친 듯 일하며 폭염을 뚫고 지나왔는데, 막상 두 손에 쥐어진 것은 없습니다. 허탈감과 무력감이 서늘한 바람과 함께 순식간에 온몸을 장악합니다. 정말 몹쓸 가을입니다.
문제지를 반도 풀지 못했는데 끝날 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 정리를 하라는 조교의 냉정한 목소리를 듣는 것 같죠? 이때부터는 기분이 팍 잡쳐져 그나마 써놓은 시험지도 다 찢어버리고 나가버리고 싶어집니다. 성질 급한 사람들은 이 정도에서 ‘난 역시 안 되는 인생이야’라며 자포자기 하고 주저앉기도 하죠.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많은 이들이 가을만 오면 스스로를 무능하다고 질책하곤 합니다.
그런 면에서 가을은 마음의 독감 바이러스입니다. 면역력이 낮은 사람들은 매년 이 몹쓸 가을에 중독돼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인생에 백기를 들어버립니다. 멀쩡하던 사람이 망가지는 것 순식간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가을만 타다가는 정말 다 타서 재가 되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이 가을을 이기기 위해서는 누가 등 뒤를 밀면서 결과물을 내놓으라고 독촉을 하더라도 초조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숨을 고르면서 자신에게 얘기합니다. ‘잠깐 아직 끝나려면 멀었어’, 허탈감과 허무감이 공습을 할 때는 ‘난 생각보다 해놓은 것이 많은 놈이야’라고 자기방어로 면역력을 높여주는 것입니다.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 ‘키즈 리턴’에서 실패로 지친 두 친구는 텅 빈 운동장을 자전거로 맴맴 돕니다. “우린 이제 끝난 걸까?”라는 말에 다른 한 친구가 대답합니다. “아직 시작도 안 했잖아.” 이 몹쓸 가을이 당신을 장악하지 못하게 막아줄 백신은 이 말이 아닐까요.
그러나 저러나, 가을만 되면 외롭다고 아우성인 분들, 봄·여름·겨울에도 외롭게 지내더군요. 가을엔 편지를 쓰세요. 수신인은 바로 당신. 그러니까 상투적 어구로 늘 방어하기에 급급했던 당신의 감정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비쳐지는지, 과연 진심을 가지고 남을 대하는지…. 편지를 보내고 나면 곧 답장이 오겠지요. 답장 안에는 나도 몰랐던 내 까탈스러움이 담겨있을 겁니다. 다음에는 변화를 위한 실천을 해야겠지요.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주고 싶은 좋은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래야 다가오는 겨울에 얼어 죽지 않을 테니까요. 지금 가을의 의미는 여기에 있답니다.
/건국대병원 신경정신과 교수
수 많은 집착 속에서 현대인은 어느 덧 '중독' 증세를 보이고 있다. 우리시대의 중독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