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마비 1년만에 연극무대 복귀한 사미자씨
몸빼 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무대 뒤에서 나타났다. “분장이 덜 끝나서, 호호호….” 다소 부산한 듯한 몸 동작과 반 옥타브 높은 비음(鼻音). 1년 전 TV에서 보던 모습 그대로였다. 여전히 곱고 팽팽하고 도도했다. 죽을 고비를 넘긴 환자 모습은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2005년 12월8일, 탤런트 사미자(66)씨는 급성 심근경색으로 서울 한 대학병원 응급실로 후송됐다. 충북 진천에서 새벽 드라마 촬영을 할 때부터 이상했다. 손과 발 놀림이 예사롭지 않았고, 가슴에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식은 땀을 비 오듯 쏟으며 겨우 촬영을 끝낸 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쓰러졌다. 검사를 해 보니 세 개의 심장동맥 모두가 꽉 막혀 심장근육에 피가 공급되지 않고 있었다.
흔히 ‘심장마비’라고 부르는 상태였다. 1분도 지체할 수 없었다. 의료진이 즉시 혈관 속에 스프링을 넣어 제일 크게 막힌 혈관 한 개를 넓히는 응급시술을 했다. 중환자실에서 눈을 뜨며 “살았구나”는 안도감에 맥이 풀렸다고 했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나머지 심장 혈관들 상태도 몹시 나빠 언제 다시 심근경색이 생길 지 모르는 상태였다. 1주일 뒤, 병원을 옮겨 가슴을 열고 심장혈관을 교체하는 대수술을 받았다. “죽음 문턱을 반쯤 넘었다 되돌아 왔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고 했다.
1963년 동아방송 성우 1기로 데뷔한 사 씨는 1969년 인기 드라마 ‘아씨’로 톱 탤런트가 됐다. 40년 넘게 눈 코 뜰 새 없는 방송·공연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건강을 돌 볼 시간이 없었다. 스트레스와 운동부족으로 중년을 넘기면서 복부비만이 됐고, 체중도 한 때 68㎏까지 늘었다. 혈압과 콜레스테롤이 높았지만 신경 쓸 새가 없었고, 물론 약도 복용하지 않았다. 5년 전까진 담배도 피웠다. 동맥경화가 심각하게 진행되면서 심장혈관이 거의 다 막혔지만 쓰러지는 그 순간까지 사 씨는 스스로 건강하다고 믿고 있었다. “피가 조금 탁하다고만 알고 있었지 그렇게까지 심각한 상태인 줄 몰랐다”고 했다.
사 씨의 심근경색은 흡연, 고지혈증, 폐경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응급시술로 막힌 심장혈관을 개통시킨 ‘생명의 은인’ 오동진(강동성심병원 심장내과) 교수의 말이다. 심근경색이 생기기 전엔 대부분 전조(前兆) 증상으로 가슴 통증이 나타난다. 대부분 계단을 오르는 등 운동을 할 때 통증이 심해지지만, 밤에 잠을 자거나 잠에서 깼을 때 통증이 나타나기도 한다.
사 씨는 그러나 “아팠으면 진즉 알았겠지. 한 번도 아프지 않았어”라고 했다. 오동진 교수는 “심근경색 환자 중 상당수는 전조 통증이 전혀 없이 갑작스레 발병하는데 사 씨가 대표적 경우다. 전조 증상 없는 심근경색은 젊은 사람보다 나이 많은 사람에게, 남자 보다 여자에게, 폐경 이전보다 이후에 많다”고 설명했다. 이런 사람은 경고 사인도 없이 갑자기 심근경색이 발생하므로 전조 통증이 있는 사람에 비해 사망률이 훨씬 높을 수 밖에 없다. 흡연, 고혈압, 고지혈증, 당뇨병, 비만, 스트레스 같은 심근경색 위험 인자를 평소에 잘 관리하고 주기적으로 운동부하검사, 심장초음파검사, 심혈관조영술 같은 정밀검사로 혈관상태를 체크하는 수 밖에 없다. 너무 바쁜 사 씨는 그것을 하지 못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1주일쯤 뒤 사 씨는 퇴원했다. 퇴원할 때 의사는 꼬박꼬박 약을 복용하고, 하루 두 시간쯤 운동하고, 살을 빼라고 주문했다. 생명이 걸린, 거역할 수 없는 메시지였다. 즉시 집 안에 실내 운동기구를 사 들였고, 식단도 야채 위주로 바꾸었다. 웬만하면 자가용 대신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해 걸어 다녔다. 그러나 건강에 대해 조금씩 자신이 붙을 때쯤 마음의 감기, 우울증이 찾아왔다. 40년간 인기를 누렸는데 이렇게 잊혀져 가는 것 같아 괜히 짜증이 나고 불안했다. 그렇게 싹싹한 아들들도 엄마에게 소홀히 대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남편도 괜히 미웠다. 마음의 병은 2~3개월간 사 씨를 괴롭혔다.
지난 여름 연극 섭외가 들어 왔다. 현재 서울 코엑스 아트홀에서 공연 중인 ‘늙은 부부 이야기’였다. 마음의 병을 떨쳐내려면 일을 하면서 사람들을 만나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자가처방은 주효(奏效)했다. 연습장을 나가고 사람을 만나며 대본을 외우고 몸을 움직이는 동안 기분이 좋아졌다. 예전의 그 모습으로 되돌아 온 것이다. “아팠던 얘기는 이번 한 번만 하고, 앞으론 절대 (인터뷰에) 응하지 않을 꺼야.” 눈썰미를 치켜 세우며 말했다.
“제발 담배 끊으시고, 소식(小食)·운동하시고, 정기적으로 검진 받으세요. 겪고 나니 심장혈관질환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았어요.”
/ 임호준 기자 hjlim@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