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수의 우울증 클리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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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클립아트코리아
우울증 환자 중에는 술을 약처럼 사용하는 이들이 있다. 잠들기 위해 마시고, 생각을 멈추기 위해 마신다. 외로움을 견디고, 자기혐오에서 벗어나기 위해, 긴장을 풀려고 술을 마신다. “술로 스트레스를 푼다”고 말하는 환자들도 많다. 술은 실제로 잠깐의 진정 효과를 낸다. 문제는 그 효과가 너무 짧고, 대가가 너무 크다는 데 있다.

알코올은 참 교묘한 물질이다. 처음에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든다. 굳어 있던 몸이 풀리고, 말문이 트이고, 마음속에 엉켜 있던 걱정이 잠시 물러난다. 불안으로 예민해진 뇌에 브레이크가 걸리는 것 같다. 그래서 술이 문제라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술을 찾게 된다. 술이 고통을 해결해 주지는 못해도, 잠시 잊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알코올은 뇌의 여러 신경전달물질에 영향을 준다. 도파민과 엔도르핀을 자극해 기분을 잠시 띄우고, 긴장을 풀어준다. 특히 뇌의 브레이크 역할을 하는 GABA의 작용을 강화하고, 흥분을 담당하는 글루타메이트의 작용을 억제한다. 그래서 술을 마시면 처음에는 몸과 마음이 이완된다. 불안이 줄어들고, 잠도 쉽게 올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뇌는 한쪽으로 기울여진 상태를 그대로 두지 않는다. 알코올로 인해 진정 작용이 강해지면, 균형을 맞추기 위해 반대 방향으로 조절이 시작된다. 흥분성 시스템이 다시 활성화되고, 스트레스 반응도 높아진다. 문제는 알코올이 몸에서 빠져나간 뒤에도 이 보상 작용이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음주한 다음 날 아침, 이유 없이 가슴이 뛰고 불안해진다. 잠은 잔 것 같은데 개운하지 않다. 사소한 말에도 예민해지고, 별일 아닌데도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진다. 이것은 단순한 숙취만은 아니다. 술이 뇌의 균형을 흔들어놓은 결과다. 알코올은 수면도 망가뜨린다. 술을 마시면 잠이 드는 시간이 짧아질 수 있다. 그래서 불면에 시달리는 사람은 술을 수면제처럼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술로 유도된 잠은 질 좋은 잠이 아니다. 깊은 수면은 줄어들고, 렘수면을 포함한 수면 구조가 흐트러진다. 새벽에 자주 깨고, 자고 나도 푹 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우울증 환자에게 수면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다. 감정을 회복하고 생각을 정리하며 다음 날을 버티게 해주는 중요한 치료 자원이다. 술은 이 중요한 자원을 갉아먹는다.

스트레스 호르몬도 문제다. 과음 뒤에는 코르티솔 같은 스트레스 호르몬이 높은 상태로 유지된다. 몸은 쉬고 싶은데 뇌는 각성되어 있다. 기운은 없는데 마음은 불안해진다. 이 모순된 상태가 다음 날의 우울감을 더 깊게 만든다. 뇌는 활성화되어 있지만, 기력은 소진된 상태다. 이것이 술 마신 다음 날 많은 사람이 겪는 불안과 우울의 생리적 배경이다.


술이 다음 날의 기분을 망가뜨리는 과정은 뇌 안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최근에는 장과 뇌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장-뇌 축(Gut-Brain Axis)’도 주목받고 있다. 술은 뇌에만 작용하는 물질이 아니다. 알코올은 위장관을 지나며 장 점막을 자극하고, 장내 미생물의 균형을 깨뜨린다. 반복적인 음주는 장내 미생물의 다양성을 떨어뜨리고, 장 점막의 방어 기능을 약화시킨다. 장 안에 머물러야 할 세균 성분과 독소가 혈류로 더 쉽게 들어오게 된다. 이것을 장 투과성 증가라고 한다.

몸은 이것을 위협 신호로 인식한다. 혈류로 들어온 세균 유래 물질은 면역계를 자극하고, 염증성 사이토카인의 분비를 촉진한다. 그 결과 전신에서 낮은 수준의 염증 반응이 지속될 수 있다. 이 염증 신호는 혈액을 타고 뇌에 직접 영향을 미치거나, 미주신경과 스트레스 호르몬 경로를 통해 뇌의 면역세포인 미세아교세포를 자극한다. 그 결과 피로감, 무기력, 집중력 저하, 수면의 질 저하가 나타나고, 우울증은 악화된다.

우울과 술의 문제는 서로 엉켜 있다. 장기간의 음주는 무기력, 의욕 저하, 불면, 불안, 짜증, 집중력 저하를 일으킨다. 그런데 이 증상들은 우울증에서도 흔히 나타난다. 원래 있던 우울증 때문에 생긴 증상인지, 술 때문에 일어난 문제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우울이 술을 부르고, 술이 다시 우울을 키운다. 이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우울증과 알코올 문제는 함께 깊어진다. 술을 줄이려면 우울을 함께 다뤄야 하고, 우울을 치료하려면 술 문제도 같이 관리해야 한다.

술을 끊겠다는 의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술 문제를 의지의 부족으로만 보면 환자는 더 수치감을 느끼게 된다. 술을 끊으라고만 하고 그 사람이 왜 술에 기대게 되었는지를 보지 않으면 치료는 오래가지 못한다. 외로워서 마시는가. 불안해서 마시는가. 잠이 오지 않아서 마시는가. 자신을 비난하는 생각을 잠시 멈추고 싶어서 마시는가. 사람들 사이에서 긴장을 풀기 위해 마시는가. 술이 그 사람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술을 줄이려면 먼저 술을 마시고 싶어지는 순간의 생각을 관찰해야 한다. 언제 술이 가장 당기는지, 어떤 감정 뒤에 술 생각이 나는지, 술을 마시기 전 마음속에서 어떤 생각이 반복되는지 살펴본다. “오늘 하루 너무 힘들었으니까 한잔은 괜찮아” “이렇게라도 안 하면 못 잘 것 같아” “잠깐이라도 잊고 싶어” 이런 생각들을 알아차릴 수 있어야 술잔으로 향하는 손을 멈추고, 지금 내게 정말 중요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물을 수 있다.

이후, 술이 맡고 있던 역할을 다른 행동으로 조금씩 바꿔나간다. 잠들기 위해 마셨다면 수면 습관을 다시 세운다. 긴장을 풀기 위해 마셨다면 산책, 호흡, 따뜻한 샤워, 가벼운 스트레칭처럼 몸을 진정시키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 마셨다면 누군가에게 짧은 메시지를 보내거나, 혼자 견디는 시간을 덜 고립되게 만드는 장치가 필요하다. 저녁 식사 때, 친구들과 외출할 때, 또는 힘든 하루를 보낸 후 마시던 술을 대체할 만한 것을 준비한다. 냉장고 속에 술 대신 무알코올 음료를 넣어두는 것도 금주를 위한 좋은 시작이다.


김병수 김병수정신건강의학과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