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이정표]

누구나 마음의 병을 겪을 수 있지만 쉽게 털어놓기 힘들고 때론 스스로 인정하는 것도 어려움을 겪는다. 헬스조선은 일산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이강준 교수의 칼럼을 연재해 ‘읽으면서 치유되는 마음의 의학’을 독자와 나누려 한다. 정신건강 문제를 풀어내고 치유와 회복의 길을 제시한다.(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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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부정적인 평가를 미리 전제한 채 두려워하기보다 차근차근 자신감과 경험을 쌓아가다 보면 두려움은 결국 점차 옅어지게 된다./사진=클립아트코리아
“회의 시간만 되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머릿속이 멍해져요. 제가 말할 차례가 올까봐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30대 직장인 A씨는 발표를 앞두고 얼굴이 붉어지고 목소리가 떨리는 경험을 반복하다 점점 회의 자체를 피하게 됐다. 준비를 철저히 한 뒤에도 증상이 나타나자 ‘역시 나는 사람들 앞에 서면 안 돼’라는 생각이 굳어져 버렸다. 이후로는 회의나 발표 자리에서 질문을 받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발언 기회가 생기면 최대한 짧게 끝내려 애썼다. 피하는 행동이 많아질수록 자존감은 떨어지고 불안은 커졌다. 이러한 모습은 사회불안장애, 즉 사회공포증의 흔한 증상이다. 비슷한 경우는 의외로 많다. 

 “교수님이 발표자를 지목하는 순간이 가장 두렵습니다. 혹시 내가 걸리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면 그때부터 아무 내용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고 숨이 쉬어지지 않습니다.”

한 대학생은 수업 시간마다 발표순서가 돌아올까 봐 긴장하다 결국 휴학까지 하게 되었다. 또 다른 환자는 “키오스크로 주문할 때 뒤에 사람이 기다리면 손이 떨려서 주문을 못 하겠어요”라고 호소한다. 소변을 보려고 할 때 뒤에 사람이 서 있으면 소변이 잘 안 나오는 배뇨 공포도 있다. 이처럼 일상적인 상황에서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가 의식되는 순간, 수행 능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회피로 이어지는 모습이 흔히 나타난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는 인식이 긴장을 유발하고 그 긴장이 생리적 기능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핵심은 상황 자체가 아니다. 각 상황에서 타인의 평가를 과도하게 의식하고 그 결과를 파국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이 문제다. 치료 역시 특정 상황을 피하는 것이 아닌 그 상황을 바라보는 생각과 반응을 바꾸는 데 초점을 맞춘다.


사회불안장애의 중심에는 ‘타인에게 부정적으로 평가받을 것’이라는 과도한 두려움이 자리한다. 작은 실수나 신체 반응(얼굴 붉어짐, 손 떨림, 목소리 떨림 등)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고 그 결과를 치명적인 실패로 연결 짓는다. 이는 과거의 부정적인 경험, 완벽주의 성향과 맞물려 형성되는 경우가 많다. 증상은 단지 마음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심장이 뛰고 머릿속이 하얗게 되며 얼굴이 빨개지고 시선이 흔들리며 결국 회피 행동으로 이어진다. 문제는 이 회피가 불안을 덜어주기보다 더 강화시킨다는 점이다. 회복의 출발점은 생각, 감정, 행동의 고리를 이해하고 끊어내는 것이다.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자신의 자동 사고를 알아차리고 얼마나 과장되었는지 현실적으로 점검해보는 것이 우선이다. 괜찮아질 때까지 기다리기보다 불안함 가운데에서도 일상적인 행동은 시도해보도록 한다. 물론 처음엔 두렵고 힘들겠지만 피하지 말고 조금씩 경험을 넓혀 가면 점차 나아질 것이다. 

카페에서 주문하기, 회의에서 한마디 하기 같은 작은 시도들이 쌓이면서 ‘생각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새로운 학습이 이뤄진다. 많은 사람들이 얼굴이 붉어지거나 목소리가 떨리는 순간을 수치스럽다고 느끼지만 인지행동치료는 그것을 실패가 아닌 ‘훈련의 과정’으로 생각한다. 불안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불안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경우가 인지행동치료만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불안이 일상생활에 장애를 일으킬 정도로 심하고 노출 자체가 어려울 만큼 증상이 심각한 경우에는 약물 치료가 도움이 된다.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 계열의 항우울제는 사회불안의 강도를 낮추고 과도한 긴장을 완화하는 효과가 있다. 초기 단계에서 약물치료와 인지행동치료를 병행할 때 더 좋은 결과를 보이기도 한다. 호흡 훈련이나 이완 요법처럼 신체 반응을 조절하는 방법, 주의 초점을 자신이 아닌 외부로 돌리는 훈련도 고려해볼 수 있다.

치료 과정에서 환자들이 가장 크게 깨닫는 부분이 바로 ‘생각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안을 견디며 머무를 수 있는 자신감과 경험이 쌓이면 두려움은 점차 힘을 잃는다. 사회불안장애에서 벗어나는 길은 완벽해지는 데 있지 않다. 불완전한 상태로도 사람들 속에 머무를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데 있다.


기고자=이강준 일산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한국정신신체의학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