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크인(walk-in) 환자만으로도 이미 진료 역량이 포화 상태인데 사전 문의 없이 환자를 이송하면 결국 현장 의료진이 감당해야 합니다.” 정부가 시행하고 있는 호남권 응급환자 이송체계 개편 시범사업에 대해 전면 재점검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응급실 과밀화와 배후진료 공백, 의료진 법적 부담 등이 현장에서 심각한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대한전공의협의회 산하 젊은의사정책연구원(YPPI)은 14일 호남권 응급의료기관 현장 실태를 분석한 정책브리프를 발간했다. 브리프에는 해당 지역에서 근무하는 응급의학과·내과계·외과계 전공의들의 현장 경험을 담은 ‘현장 전공의 르포 및 정책 제언’과 지난 4월 실시한 ‘전공의 실태조사’ 결과 분석 내용이 담겼다.

보건복지부와 소방청은 지난 3월부터 광역상황실을 중심으로 한 호남권 응급환자 이송체계 혁신 시범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정부는 이를 통해 이른바 ‘응급실 뺑뺑이’ 문제를 줄이겠다는 방침이지만, 현장 의료진들은 정책과 실제 진료 환경 사이의 괴리가 크다고 지적했다.

현장 르포에는 응급실 과밀화와 환자 수용 부담을 호소하는 전공의들의 목소리가 담겼다. 광주의 한 응급의학과 전공의는 “워크인 환자만으로도 이미 진료 역량이 포화 상태인데 사전 문의 없이 환자를 이송하면 결국 현장 의료진이 감당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전공의는 “경증 환자인데도 환자가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상급병원 응급실까지 이송되는 사례가 반복되고 있다”고 말했다.


배후진료 체계 부족에 대한 지적도 이어졌다. 전북 지역 한 내과계 전공의는 “중환자실이 이미 가득 찬 상황에서 추가 환자를 수용하면 결국 환자에게 해가 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외과계 전공의 역시 “응급실에서 환자를 받아도 실제 수술 가능한 의료진 연결이 되지 않으면 처치 지연은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특히 전공의들은 환자를 수용한 이후 의료기관의 처치 역량을 초과하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의료진이 법적 책임을 떠안게 되는 구조적 공백을 가장 큰 문제로 꼽았다. 연구원은 현재 국회에 발의된 응급의료법 개정안 4건 모두 의료진 형사처벌 면책을 공통 과제로 포함하고 있다는 점 역시 현장의 우려를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태조사 결과에서도 부정적 평가가 두드러졌다. 전체 응답자의 71%는 시범사업 운영 만족도에 대해 10점 만점 기준 3점 이하를 부여했으며, 최하점인 1점을 준 응답자도 32%였다. 내과계와 외과계 전공의에서는 각각 82%, 83%가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전공의들이 꼽은 가장 큰 문제는 ‘의료사고에 대한 법적 부담’이었다. 전체 응답자의 82%가 이를 주요 난관으로 지목했다. 이어 ▲광역상황실의 현장 수용 역량 파악 미흡(59%) ▲119 사전 고지 의무 폐지(57%) 등이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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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이미지./사진=연합뉴스
구급대원의 사전 중증도 분류 체계(pre-KTAS)에 대한 신뢰도도 낮게 나타났다. 전체 응답자의 66%가 구급대원의 중증도 분류와 실제 임상 상태 간 일치도가 낮다고 평가했으며, 응급의학과 전공의에서는 부정 응답 비율이 80%에 달했다.

광역상황실 운영 방식에 대한 불신도 확인됐다. 전체 응답자의 78%는 상황실의 이송 지원과 우선 수용 지시가 병원의 실제 수술실·중환자실·배후진료 인력 상황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고 응답했다.


젊은의사정책연구원은 정책브리프를 통해 응급의료법 개정안 심사와 시범사업 평가 과정에서 세 가지 선결 과제가 우선 반영돼야 한다고 제언했다. 우선 중증·응급환자 진료 과정에서 발생한 의료사고에 대한 형사처벌 면책과 국가 책임 기반의 배상·보상체계 구축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어 응급실과 수술실, 중환자실 간 치료 연속성을 보장할 수 있도록 배후진료 인력 확충과 전원 기준 정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병상과 수술실, 중환자실, 당직 전문의 현황 등을 실시간으로 공유할 수 있는 데이터 체계를 고도화하고, 광역상황실 역시 일방적인 수용 지시 기관이 아니라 현장 의료진과 사전 협의하는 조정 중심 체계로 운영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구원은 “응급실 뺑뺑이 해소는 단순히 구급차 목적지를 지정하는 것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라며 “응급환자 이송체계 개편은 행정 효율화가 아니라 환자 안전과 직결되는 사안인 만큼, 시범사업 종료 이후 반드시 현장 의료진의 경험과 데이터를 중심으로 제도를 재점검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상훈 기자